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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명 May 04. 2023

제9장. 민족혁명의 길 #10/10

10화. 민족유일당촉성회 연합회

 10화. 민족유일당촉성회 연합회     


 민족유일당은 작년 10월, 안창호가 불을 붙인 북경촉성회에 이어서 1927년 3월 21일 상해촉성회를 결성했다. 그러자 5월 8일, 광동에서는 의열단이 ‘독립당촉성운동선언’을 발표했다. 김원봉과 김성숙이 불을 지핀 것이다. 이후 광동촉성회와 우한촉성회도 결성되었다. 북경촉성회는 조성환이 대표요, 회원으로는 안창호, 원세훈, 장건상 등 40여 명이 있었다. 상해촉성회는 홍진이 국무령을 사임하면서 임시정부와 흥사단 요인들을 포함하여 160여 명이 참여하였고, 좌파 홍남표를 대표로 추대하였다. 광동촉성회의 대표는 정학빈으로, 1927년 5월 8일 170여 명이 참가하여 결성되었다. 우한촉성회는 1927년 7월 초에 150명이 참가하였는데 대부분 의열단원이었다. 박건웅과 백덕림이 대표로 추대되었다. 


 안창호는 의열단의 선언문을 훑어보았다. 선언문은 유일당촉성운동이 필요한 이유로 ‘첫째, 일본의 학살로 세계 피압박민족 해방전쟁의 객관적 조건이 형성되었고, 둘째, 임시정부를 위한 통일운동의 실패 경험을 거울 삼고, 셋째, 공산당선언에 따른 세계 혁명사상의 대두와 새로운 청년층의 성장으로 통일적 중추 기관이 필요함’ 등 세 가지를 꼽고 있었다. 의열단원은 혁명대당인 유일당 결성을 촉진하는데 개인 본위로 활동하고, 혁명대당이 결성되면 의열단은 즉시 해체한다는 뜻을 밝혔다. 의열단원은 9월 27일 남경촉성회 결성식을 앞두고 있었다.      


 안창호는 남경으로 가서 흥사단 청년 동지들과 중국의 사태 변화에 대응할 전략을 수립해야만 했다. 국공합작 결렬 사태와 장개석의 공산당원 학살 여파가 걱정되었다. 광동성 광주지역 군관학교에 입교한 한국 청년들은 난관에 빠졌다. 장개석은 항일전이 우선일까? 반공 척살이 우선일까? 이에 한국군 지도부의 입장은 어떤 상황일까? 동명학원과 흥사단은 남경 정부와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일본의 만주전략과 관련하여 남경 정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안창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우선은 사태를 주시하자. 중국 땅에서 독립운동의 신세를 지고 있는 한국. 어쩔 수 없이 중국 정세에 휘둘리고 있지만, 우리의 목적은 독립이고 전술은 민족혁명이다. 이데올로기는 차후의 문제다.’

 마침 여운형이 남경에서 안창호를 기다린다고 했다. 여운형은 타스통신사를 나왔다. 국공 결렬이 이유라고 했다. 여운형은 장개석의 북벌군 참모장 바이충시(白崇禧)군에 체포되었다가 외교력을 발휘하여 탈출에 성공했다. 1928년 새 학기부터는 상해 복단대학교 체육교수로 부임한다고 했다.  

    

 남경 금릉대학 캠퍼스 북쪽. 안창호는 여운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했던 시간이 되자 여운형이 김원봉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여운형과 김원봉은 띠동갑이었고, 둘 다 이곳 금릉대학 출신이었다. 금릉대학은 선우혁 형제를 비롯하여 많은 한국 청년이 수학한 곳이다. ‘동명학원을 금릉 대학처럼 발전시킬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안창호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있는 민족주의 좌파로 정치성향이 비슷했지만, 여운형은 외교에 발이 넓었고 김원봉은 행동 대장이었다. 두 사람은 휴머니스트이고 통일주의자였다. 안창호는 두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못다 한 민족혁명운동은 저들에게 달려 있다. 조국광복 이후에도...!’

 정원 바위에 앉아 있던 안창호를 보자 두 사람은 동시에 꾸벅 인사했다.  

 “선생님이 먼저 와 계시네요.” 김원봉이 말을 꺼냈다. 여운형은 웃고 있었다. 

 안창호가 앉은 채 두 사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두 분의 아우라가 캠퍼스 석양과 잘 어울리더이다. 하하. 반갑소. 손 좀 잡아 봅시다.”

 여운형이 일어서려는 안창호의 왼손 팔꿈치를 부축하며 말했다. “만주 유일당 유세로 피곤하셨을 텐데 남경까지 오셨군요.”

 안창호가 일어서서 김원봉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만주통일대당을 위해 노력했으나 성과가 미진한 듯한데, 우리 약산 동지는 광동과 우한에 유일당촉성회를 결성했다니 참으로 대단하오. 의열단의 단세 확장이 놀랍소. 수고하셨소.” 

 김원봉이 겸연쩍어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말했다. “제가 나름 노선에 고집을 부리다가 에둘러 이제야 선생님 뜻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좌우 통합운동이 필요한 것을 이제 철이 들어 알게 되었습니다.”

 안창호가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요. 약산은 파벌로 나뉜 임시정부나 국민대표회의의 본질을 옳게 꿰뚫었소. 처음부터 나는 약산의 의열운동 전략에 감동했었지. 누군가는 해야 하는 목숨을 바치는 운동이오.”

 여운형이 끼어들었다. “최초의 의열 운동은 미주 공립협회에서 벌인 스티븐슨 처단이었지요. 그리고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쾌거. 그것도 실은 공립협회의 공이 아니던가요. 선생님은 처음부터 의열단 운동을 지지하셨지요.”

 김원봉이 말했다. “제가 의열단을 조직하고 거사에 목말랐을 때, 선생님은 탄피제조기를 후원하시고 폭탄제조 기술자를 연결해 주셨지요. 울란바토르 이태준과 헝가리인 마자르, 그리고 흥사단 동지들인 임득산, 문일민, 이석 동지가 의열단의 구원투수였습니다.”

 안창호가 말했다. “그 세월이 곧 10년이군!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각계 독립운동을 하나의 정당정치로 모아 통일된 명령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데 공감이 형성된 듯하오. 하지만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지. 임시정부 초기와는 완전 딴판이오. 안 그렇소?”

 여운형이 물었다. “만주 3부 통합운동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3부 지도자들은 민족유일당에 공감은 되었으나 그 많은 단체가 주장과 입장이 제각각이오. 그래서 지도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더이다. 양기탁 선배가 애를 많이 쓰고 계신다오. 나는 김동삼, 김좌진, 이탁, 오동진, 지청천 동지를 믿고 있소. 쉽지는 않겠지만 통합은 이루어 낼 거요. 문제는...”  안창호는 말끝을 흐렸다.

 김원봉은 궁금했다. “문제는... 만주도 공산주의 계열과의 합작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요. 그들도 코민테른의 눈치를 봐야 할 테니까. 이쪽 명령체계보다 어쩌면 스탈린 명령체계가 더 두려울 수 있겠지요.”

 안창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공산당 청년들은 신념에 사로잡혀 물불을 안 가리니 정성껏 협력을 구해야 하고, 게다가 만주는 일본 밀정이 날뛰고 삼시협정 때문에 골치요. 1세대 민족 지도자들의 고충은 이중 삼중으로 겹쳐있소. 이래저래 우리의 군사력이 만주에 집중되어 있어 걱정이오.”

 여운형이 입을 열었다. “레닌의 후계자 스탈린은 타협이 없는 강경파요, 극동을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에 대한 적개심이 강해 경계가 삼엄하지요. 한국인을 일본 간첩으로 오해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동양인 구분을 못 하니까요. 그런데 한국인들은 어디에다 놔둬도 척박한 땅을 기름지게 일구는 재주를 가졌다고.... 그래서 항간에는 고려인 집단이주 계획도 갖고 있답니다. 이러한 모든 위험에 독립군 3부가 대응해야 합니다.”

 안창호가 물었다. “고려인 집단이주라. 아직은 이상촌 토지도 확보하지 못했는데 삶의 터전을 또 잃게 되겠군. 고난과 시련이 너무 크오. 일본과 야합한 만주 군벌은 결국 일본에 의해 점령당하겠지만, 지금은 장개석 쿠데타군이 공산당원들을 색출해서 처형하고 있으니 이 또한, 살벌하오. 연소용공, 공농부조가 깨지면 우리 유일당운동에도 큰 여파가 올 테지요?”

 여운형이 안창호의 물음에 대답하듯 말했다. “장개석 쿠데타로 국공 결렬은 당연한 처사요, 모스크바와 중국 관계가 일시적으로 나빠지겠지만 중국 내 공산당은 그렇게 만만하게 볼 수도 없습니다. 광주지역의 공산당 투쟁은 지켜봐야 할 듯합니다.”

 김원봉이 말했다. “황포군관학교 출신 장교들은 양쪽에 걸쳐있지요. 공산당과 국민당.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그러나 옳지 못한 민중 학살 편에 설 수는 없는 것. 국공 분열은 중국 국민혁명의 실상과 허상을 보여줍니다.”

 안창호가 물었다. “황포군관학교 분교에도 한국 청년들이 많이 입교했다고 들었소.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겠소?”

 김원봉이 대답했다. “손문 사후에 국민혁명군 총사령직을 장악한 장개석이 북벌에 나서자, 반 장개석 국민당파와 공산당은 우한에 정부를 따로 수립했습니다. 장개석은 남창에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대응하다가 북벌 과정에서 상해에서 4.12 반공정변을 일으키고 공산당 토벌에 나선 것이지요.”

 안창호가 말했다. “국공합작의 싹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구려. 우리 민족유일당운동의 씨앗도 전철을 밟으면 안 되는데....”

 여운형이 말했다. “지도자가 사라지니까 구심점이 없어지고, 집단지도체제로 대안을 마련했지요. 하지만 야심가들은 연합체제(왕정위와 장개석)로 야합했다가 일인체제로 권력을 사유화해 반공노선으로 선회하고....”

 김원봉이 보충 설명을 했다. “장개석은 군벌과의 전쟁 과정에서 공산당이 지휘하던 군함 중산함이 황포로 회항했다 하여(1926.3) 자신에 대한 쿠데타로 판단했습니다. 그리고는 공산당 지휘관과 소련 고문을 체포, 연금했지요. 그것이 아마 시작인 듯합니다.”

 안창호가 힘없이 말했다. “우한분교 입교생인 한국인 군관들은 어떻게 되었소?” 

 김원봉이 대답했다. “그나마 우한정부 수립으로 국공합작 정부의 모범이 될 줄 알았는데 쿠데타 여파로 8월 1일, 결국 폐교령에 봉착했지요. 이들은 주은래가 주도하는 남창봉기에 참여했습니다. 여기서 동포 군관들은 두각을 나타내며 대부분 공산당 지지파로 기울었습니다.”

 안창호가 다시 말했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참으로 어렵고 곤란한 일이군. 한국 군관들이 지혜롭게 대처하길 바라오.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쏠리면 우리 독립운동에도 큰 손실을 볼 수가 있소. 우리에게는 한국의 민족혁명을 완수하는 일이 바로 대공이오.” 

 여운형이 말했다. “저는 서간도 통의부와 북만 조선혁명군 등 만주와 노령지역 청년들을 국공합작의 군관학교에 대거 입교시켜 유일당 신흥 세력의 기초를 수립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안창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요. 우리 힘으로 기지를 개척하고 군관학교를 설립해서 체계적으로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무수히 좌절되었지요. 그러니 때마침 중국의 국공합작에 기대를 걸었던 게 사실이오. 그나저나 세계정세가 요동치고 변해도 일본은 끄떡없으니....” 

 여운형이 김원봉을 쳐다보며 말했다. “선생님, 약산은 4기생인데 군관학교 2인자 정치부 주임인 주은래와 동갑이요, 친구랍니다. 두 사람 뜻이 잘 맞아서 약산도 정치부에 근무한답니다. 앞으로 약산의 민족 협동전선 운동에 기대가 큽니다.” 

 안창호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오, 중국군관학교에 실력자라. 잘되었소. 의열단 동지들이 많아 힘이 되겠소. 중국의 국공 분열에 한국이 대안을 제시하였군. 민족협동전선이라.... 참으로 훌륭한 전략이오. 한국 내부의 다양한 노선도 민족협동전선으로 하나 될 수 있겠소.”

 김원봉도 안창호의 응원에 힘이 났다. “양림, 김성숙, 장지락, 안광천, 이영준 등과 자주 만나면서 선생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자유연합, 상호부조의 원리에 입각해, 한중 협동을 통해 이상촌 건설 사업을 추진하시는 것에 관해서도요. 의열단은 유일독립당 운동에 전력투구할 것입니다,” 

 안창호는 차세대 지도자 김원봉이 추구하는 민족협동전선의 키워드로 ‘협동’을 생각했다. ‘협동을 통해서 대일전선을 구축한다. 유일당의 핵심 키워드는 협동이다.’

 “나는 말이오. 우리 민족이 통일되지 않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았다오. 3.1운동을 통해서 많이 배웠지. 통일운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오. 3.1운동은 민중과 지식인이 하나가 된 통일 저항운동이었소. 그때만 해도 계급적 인식이 선행된 것은 아니었소. 종교계와 정파 가릴 것 없이 각처의 선각 지식인들이 통일된 한마음으로 민중의 선봉에 섰기 때문에, 위대한 만세운동이 가능했던 겁니다. 통일된 한마음. 나는 이것을 공적 통일이라 칭하고 싶소.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과정은 어땠소? 사적 계파들이 대의를 장악하려고 서로 모함하고 갈라지고 하지 않았소? 국민대표회의가 무산되었을 때 나는 3.1운동 민중 앞에 창피했소이다. 독립운동은 대공운동이오. 우리의 실패와 좌절은 좌우할 것 없이 우리 탓이오. 통일이 어렵다면 협동도 중요한 전략이라 생각되는군.”

 여운형이 말했다. “선생님 말씀 안에는 언제나 내면 깊은 성찰과 고뇌에서 우러나는 사상이 느껴집니다. 민중, 애민정신, 공적 통일, 대공주의. 이런 생각들이 바로 그 꽃봉오리 같습니다.”

 김원봉도 공감했다. “유일당 운동은 공적 통일기관 운동이요, 방법은 좌우합작, 협동전선 구축.... 뭔가 선명하게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역시 선생님이십니다.” 

 “오, 그렇소? 공적 통일은 비타협적 항일운동을 전제로 하고 있소. 민족진영 내부에 자치운동이 목소리를 갖게 해서는 안 되지. 중국 관내에서는 절대 독립을 위해 공적주의를 내세워 대세를 형성해야 합니다.” 안창호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여운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국내 신간회 조직에서 이광수의 조직은 빠져 있습니다. 수양회 운동이니까. 정치 운동 조직에서 빠진 것으로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만, 춘원의 붓끝이 선생님의 뜻과 다를까 염려됩니다. 차라리... 붓을 들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듭니다. 춘원의 붓이 ‘2.8독립선언서’ 같은 명문장을 탄생시키긴 했지만 지금은....”

 안창호는 침묵했다. 

 김원봉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협동의 여지를 만들어 공적 개념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다면, 공론 형성과정에서 상생의 여지도 있지 않을까요? 그 과정에서 대공사상도 우리 민족 통일론으로 약소국들 입지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안창호는 생각했다. ‘약산은 언제나 대안을 여백으로 남겨 놓는 탁월한 리더십을 가졌다. 대공사상. 이 사상이 유일당 건설에 대안적으로 자리매김한다면 독립국가에 대한 비전도 수립해야 한다. 6대 사업을 요약한다면, 정치, 경제, 교육의 균형 발전이 필요하다. 외교전략에서는 미국과 소련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피압박 약소국과 동맹을 강화하는 민족 평등의 사상을 수립해야 한다. 한국 독립운동에 절실한 부분이 민족 평등이다.’

 여운형이 생각에 빠진 안창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민족유일당이 성립되면 계급혁명의 단계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 만주의 경우에 조선공산당이 만주총국을 설치해서 코민테른 테제의 영향을 받고 있을 텐데요.”

 안창호가 말했다. “1922년 극동인민대표대회 현장에서 소련 고위층이 ‘한국은 민족혁명단계’라고 했던 말이 귀에 쟁쟁하오. 몽양이 그대로 전해줬었지. 그 후 5년 세월이 흘렀소. 한국에 진정한 계급의식을 가진 민중이 성장했을까? 길림 3부 회의 때 박병희가 그러더군. 민족혁명이 곧 계급혁명이라고.”

 여운형이 말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한국 사정이 갈수록 폭압적인 노동자농민 인력 수탈 구조로 가고 있고, 이를 견디지 못하는 민중이 짐을 싸서 국경을 넘고 있으니.... 이들을 계몽시켜 군사력으로 활용하자는 취지로 이해됩니다. 생산구조를 장악하고 있는 일본의 자본 착취와 노동력 수탈은 국내 계급의식 성장에 큰 걸림돌이지요.”

 김원봉이 다짐을 하듯이 말했다. “우선은 모든 당파와 민중이 독립, 즉 대공으로 하나가 되도록 운동을 펼쳐 나가야겠습니다.”

 안창호는 이들이 든든했다. 대공과 협동. 이 진보적인 생각들이 독립을 앞당길 것으로 믿었다. 


 유일당남경촉성회는 1927년 9월 27일, 의열단원 김일주가 중심이 되어 의열단원 다수와 남경에 산재한 흥사단 청년 일부가 참여하여 결성되었다. 이날 북경, 상해, 우한, 광동의 각 촉성회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안창호는 중국혁명 과정에서 국공합작의 결렬과 연소용공 정책에 대한 코민테른의 반응을 주시하기로 하고 촉성회연합회 조직을 제안했다. 대부분 이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11월 9일부터 22일에 걸쳐 상해 민국로 침례회당에서 각 촉성회 대표들과 회합을 열고 유일독립당촉성회연합회를 구축했다. 이들은 민족유일당 창설을 위해 노력할 것과 한국독립에 필요한 전 민족적 혁명역량을 총 집중하는 데 선구가 될 것 등을 결의하고, 폐막일에 ‘독립운동의 흥과 패는 당조직 여부에 달렸다.’라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상해에서 유일당촉성회연합회가 결성되자 청년들은 이에 호응하여 자발적으로 학생회 단체들을 조직했다. 화동한인학생연합회와 한인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12월 한국노병회가 ‘재만동포구축에 즈음하여 재상해 교민에게 호소함’을 발표하자 재만 동포 돕기에 앞장섰다.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안재홍(1891~1965) 등이 재만동포옹호동맹을 결성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침묵을 지켜오던 하와이에서도 유일당촉성회연합회에 호응을 해왔다. 1928년 3월, 호놀룰루에서 대한민족통일촉성회 선언서가 발표된 것이다.      

 민족유일당은 공적 통일운동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제 9장 마침. 다음 장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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