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명 May 01. 2023

제9장. 민족혁명의 길 #7/10

7화. 중국 국공결렬과 유일당운동의 전망

7화. 중국 국공결렬과 유일당운동의 전망

      

 안창호는 길림에 머무는 동안 국민당 장개석의 반공 유혈 쿠데타 소식을 들었다. ‘중국이 난리가 났다. 국공합작은 깨졌다.’ 여운형이 귀띔해준 사실이 기억났다. 

 손문 사후 지도부 간의 갈등 속에서 국민당은 1926년 12월 13일 우한에 국공합작 정부를 수립하고 군벌 타도를 시작했다. 장개석이 혁명지휘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우한정부는 반장개석파와 공산당원들 중심이었다. 이에 장개석은 1927년 1월 3일 지지자들로 구성된 정부를 남창에 조직했다.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가 장개석의 혁명지휘권을 약화하는 조치를 함으로써, 우한정부는 명분 다툼에서 우세해 졌다. 장개석 북벌군이 상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해의 노동자들이 공산당의 지휘하에 무장봉기를 일으켜 군벌들을 몰아낸 때였다. 분노한 장개석은 4월 12일 무장봉기에 나선 지도부를 학살했다. 노동자와 공산당원들이 희생되었다. 상해에 들어와 있는 구미 자본가들은 장개석을 지지하고 후원했다. 장개석은 반공을 선포하고 광저우에서도 공산당원에 대해 무차별 학살을 감행했다. 우한정부는 장개석 체포 명령을 발동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4월 18일 남경에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7월 13일, 중국공산당은 결국 국민당을 탈당했다.     


 유기석이 중국 신문들을 모아 숙소로 가져왔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뒤적이며 큰 표제어들만을 골라 소리 내어 읽었다. “선생님, 길림에서 우리가 잡혀 있는 동안 일어난 일입니다. ‘장개석, 전 혁명군에 공산당 섬멸 작전 지시’, ‘왕정위, 장개석 체포령 발동’, ‘공산당, 국민당 탈당과 무장봉기로 노선 변경’, ‘국공합작 결렬’, ‘장개석 남경 정부 수립’ ....”

 유기석은 단숨에 정보들을 안창호에게 알렸다. “선생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안창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꼴이 실제로 일어났구먼. 국공합작이 깨졌다니....” 

 “장개석 군대가 북경에 입성하면 북벌은 끝나겠지요. 서로 다른 신념체계로 조화를 이루려던 손문의 기대는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마는 것일까요? ” 유기석이 말했다.

 “이당치국 체제 구축을 위한 국공합작이 깨지고 말았으니... 우리 유일당운동에도 큰 변화가 예측되오. 그나저나 빨리 상해로 가 봐야겠군.” 안창호는 앞으로의 우리 정부 일이 걱정되었다. 

 유기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의 민족혁명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각각의 신념체계로 통일한다 한들 합리적 구현이 가능할까? 어쩌면 신념에 따라 개인 본위로 투쟁하는 데까지 해 보는 것, 그것이 운명이라면 차라리 아나키즘이 설득력 있는 것 아닌가?’ 


 유기석은 북경 유학 생활을 하면서 흥사단을 알게 되었고, 대학에서 아나키즘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학생들 대부분은 선배나 교수들을 통해서 서구의 신사조에 눈을 뜨고 사상이나 이념을 수용했다. 유기석은 안창호를 만나 흥사단주의를 수용했다. 개인과 단체의 윤리확립과 주인정신으로 독립운동을 한다는데 설득되었다. 흥사단은 덕, 체. 지의 삼위일체 훈련을 제시한다. 이 3육은 개인적인 필수 수양덕목이지만 조직의 공적 사업목적 달성을 위해 동맹을 맺어 함께 훈련하도록 했다. ‘진정한 힘은 건전인격과 공고한 단결에서 나온다.’ 이러한 훈련 과정에서 진리를 갈망하는 동지애가 쌓이고 개인적인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는 흥사단의 실천 이념체계는 유기석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안창호와 안정근, 이탁, 김승만 등은 유기석의 멘토였다. 다른 한편으로 유기석은 북경 법정대학 정경학부를 다니는 또래 친구 심용해를 만나 아나키즘을 수용했다. 유기석과 심용해(1904~)는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회영, 신채호, 백정기(1896~), 유자명(1894~) 등 역대 선배들이 수용하게 된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임시정부가 이승만식 외교와 위임통치, 실력양성 노선으로 궤도를 이탈했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반대 노선인 창조파 입장을 지지하다가 결국 무정부주의로 선회했다. 무정부주의자 선배들은 공산주의와 결별하고 무력과 폭력투쟁 노선의 의열단과 궤도를 같이했다. 이들에게는 개인의 소유, 행복, 평등보다 단체의 명령에 대한 복종이 더 중요한 가치로 작용했다. 그래서 위계적이고 보수적인 면이 있었다. 유기석은 흥사단주의와 아나키즘의 조화를 생각했다.      


 1927년 7월이 되자 안창호는 손정도와 작별했다. 안창호는 유기석과 길림을 떠나 흑룡강성 영안시 영고탑으로 향했다. 흑룡강성 대부분은 발해 영역이었고 지금은 신민부 관할이었다. 대종교 본산은 삼시협정 협박 때문에 밀산현 당벽진으로 피난했다. 이 일대 한인촌을 둘러 보던 안창호는 비감에 젖었다. 

 “유 동지, 한때 우리 민족은 이 지역을 호령하던 민족이었소. 그런데 지금 현실은 이리도 비참하구려. 영웅호걸이 아무리 뛰어나도 추종하는 백성이 깨어나지 못하면 결국 망하는 것이오. 문제는 망한 나라로 대물림한다면 비참함을 면할 수는 없겠지.”

 “선생님은 나라와 국민, 양쪽 다 문제가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유기석이 반문했다. 

 “그렇소, 국민도 책임을 면할 수 없소.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까? 예견하건대 여기 만주는 곧 일본이 점령하고 말 것이오. 우리 국민은 그나마 지켜온 생존의 터전에서 쫓겨날 것이고 노예나 품팔이를 면치 못하겠지.” 

 안창호는 유기석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젊은이들이 노예살이 하도록 놓아둘 수는 없다.’

 “압박을 벗어날 수 있는 안전지대란 결코 없겠지요. 북만주 군정부가 싸워주겠지만.... 선생님, 그런데 유일당이 해답이 되겠습니까?” 유기석은 유일당운동이 국민대표회의처럼 무산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문을 품게 되었다.  

 “유일당은 시작일뿐이오. 우리는 단결하는 수양이 부족하오. 민족적 단결. 최고기관을 만들어 법과 명령에 복종하는 훈련이 부족하다는 것이지. 지도자의 명령체계가 안 서면 일본에 대한 방어나 공격이 제대로 되겠소?” 안창호의 목소리는 힘이 빠져 있었다.

 “결국, 민주적 공론의 장을 형성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은 아닌지요. 우파든 좌파든 승기를 잡은 편에서 평정을 하려면, 결국 폭력을 수반하게 되는 것 아닌가요?” 유기석은 권력과 휴머니즘의 조화는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여론을 모아 공론을 형성하고 이에 절대복종해야 한다고 믿소. 물론 법을 세워야지. 공론과 복종. 그것이 그렇게 불가능한 일인가?” 

 공립협회 시작 이후 지금까지도 안창호는 통일연합기관, 최고기관 설치만이 방법이라고 믿었다. 신민회, 국민회중앙총회,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 그리고 유일독립당. ‘내가 불가능한 이상을 추구하고 있는 것인가?’

 유기석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회의가 깨지고 분열되고 하는 과정을 보면 지도자들이 자기주장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됩니다. 내 생각이 진리인데, 너는 왜 나를 안 따라오는 거냐고 호통치는 소리로 들립니다. 봉건적 잔재가 느껴지죠. 그런데 문제는 시대의 흐름이랄까? 세대가 바뀌면서 좌파 성향의 지식인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안창호가 힘주어 말했다. “오, 그 말에 일리가 있소. 그래서 나는 이데올로기는 상대적이라 말하오.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회의장에 마주 앉아 보자는 거요. 이때 상대를 인정하는 참을성을 가지려면 자기 수양과 인격 혁명이 필요하겠지.”

  “스스로 깨달았다고 생각되는 진리를 양보하겠습니까? 잘잘못을 떠나 자기 선택을 양보하기란 쉽지 않지요.” 유기석은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자신과는 다른 이념을 인정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취지로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토론과 경청이 필요하오. 상대방의 말 속에서 뜻하지 않은 진리를 만나게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소?” 안창호는 어쩔 수 없는 세대 차이를 느꼈다. 

 “선생님, 선생님의 입단문답이 그러하지요. 생각하게 만들고 진리를 찾게 되는 대화 말입니다.” 유기석은 안창호의 대화법을 동서고금을 막론한 유일한 대화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주입식이 아닌 자각을 유도하는 대화법. 그래서 문제를 공통으로 해결하게 하는 상생의 대화법이다.’ 

 안창호는 기분이 좋아졌다. “오, 그렇소? 하하. 그럼 유 동지는 내 편이 확실하오? 하하하. 그러나 나는 내 편을 만들자고 흥사단을 조직한 것은 아니오. 흥사단이 모든 조직의 모범이 되었으면 좋겠소. 공론과 복종 말이오.” 

 “그런데 선생님, 저희가 알기로는 김좌진 장군은 소리 없는 실천가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와 담을 쌓고 있으니 좌우합작이 가능하겠습니까?” 유기석이 화제를 바꾸어 말했다.

“북만주는 대종교로 단결했지. 나철 종사나 서일 장군은 그 본보기요. 그분들은 일본의 부당한 지배와의 투쟁을 선언하면서 단군교를 일으켰소. 민족종교지. 이들이 모범을 보였기에 대종교를 믿는 백성들이 많아졌지. 애민하는 마음이 컸던 분들이오. 나도 그분들을 존경하고 있다오. 김좌진 장군은 대종교에 속한 인물로 올곧은 민족주의자요. 자유시 참변을 당한 이후 공산주의를 못 믿게 된 것이지.” 

 안창호는 김좌진이 걱정되었다. ‘적이 많다. 공산주의 청년들....’

 “유일당은 좌우합작이 최대 관건인데....” 유기석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가 요구하는 합동은 민족적 감정으로 하는 합동이 아니요, 민족적 사업에 대한 합동이니 그래서 대화가 필요하고 토론이 필요하오.” 

 “네.” 유기석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화에 계속)

이전 06화 제9장. 민족혁명의 길 #6/10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