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아픔 앞에서 의연해지기 (발라아사나)

상처를 보이는 순간, 먹잇감이 된다.

by 채채씨


아픔을 피하려고 발버둥 칠수록 상처는 더 깊게 덧났다.

그래서 나는 도망치는 대신, 가만히 그 통증을 마주해 보기로 했다.

그 결심의 첫 단추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요가 매트를 펴는 것이었다.

뻣뻣하게 굳은 몸은 그동안 내가 얼마나 긴장 상태로 타인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매트 위에서 나는 나를 할퀴고 간 그녀들의 흔적을 억지로 지우는 대신,

굳은 근육을 천천히 늘리며 내 몸의 감각에 온전히 집중하기 시작했다.


“너 전에 안 그러더니? 지금은 기분 좋은가 보네? “

날씨도 좋고 내내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던 어느 날

헤어지기 직전 그녀가 내던진 말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나르시시스트들은 타인의 나약한 이면이나 감정적 동요를

기가 막히게 포착해 먹잇감으로 삼는다고 한다.

나 역시 좋은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어 늘 남의 눈치와 기분을 살피느라 바빴으니까.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인간관계로 자존심이 상했을 때,

나는 종종 그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말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내가 무장해제하고 꺼내놓은 슬픔과 분노를

안전하게 품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약한 모습을 즐기는 듯했다.

내가 애써 잊으려 덮어둔 과거의 실패나 상처를 대화 중간중간 교묘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들춰냈다.


"더는 그 이야기하지 말자. 다 지난 일이야."

내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선을 그으면

그녀는 어김없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너 나 아니었으면 더 힘들었을 텐데? 내가 걱정돼서 하는 말인 거 알지?"


그녀는 내 상처를 헤집으며 자신이 내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자신의 우월한 위치를 계속해서 확인받으려 했다.

잊고 지냈던 감정들이 그녀의 말 한마디에 다시 수면 위로 떠올라 요동쳤다.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가도

그녀는 느닷없이 내가 상처받았던 사람들의 근황을 묻거나 내 실패를 상기시켰다.

“걔 뭐 하는지 알아?”

“걔가 너 어떻게 했었더라?”

“아 그거 어떻게 됐어? 그러게~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등 떠밀려 높은 빌딩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만남이 끝난 후 돌아오는 길이면 늘 숨이 막혔다.

나는 이미 저 멀리 두고 온 과거의 파편들을

그녀는 캐리어에 담아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기어코 내 앞에 다시 쏟아부었다.


위로받기 위해 꺼냈던 나의 연약함이

그녀의 통제력을 확인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상처가 아물만하면 생채기를 내는 그녀의 행동을

당시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과거의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과 사건들은 이미 잊힌 지 오래다.

내 앞에 마주한 그 언니가, 그녀가 가장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에 맞춰

무릎을 꿇고 상체를 바닥에 완전히 내려놓는다.

이마가 매트에 닿고 두 팔은 편안하게 머리 위로 뻗는다.

발라아사나, 아기 자세다.


깊은 후굴이나 햄스트링이 당기는 버거운 아사나를 끝내고 난 뒤

선생님이 "아기 자세로 휴식합니다"라고 말할 때면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잔뜩 긴장했던 근육이 이완되고 가빴던 숨이 비로소 고르게 자리를 찾아간다.


가장 작게 웅크려 내면으로 시선을 거두는 이 자세를 취할 때

나는 과거의 나를 떠올린다.

누군가에게 나의 약점을 보이면 공격당할까 봐 전전긍긍했던 시간들.

상처를 보인 순간 먹잇감이 되었던 아픈 기억들.


하지만 매트 위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바닥에 엎드린 지금

나는 한없이 무방비한 상태지만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함을 느낀다.

이곳에서는 내가 약해진 모습을 보여도

아무도 내 등을 찌르거나 교묘하게 파고들지 않는다.

오직 내 얕은 숨소리와 바닥에 닿은 이마의 온기만이 존재할 뿐이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억지로 끌려다녔던 과거의 웅크림과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지금의 웅크림은 확연히 다르다.


가만히 눈을 감고 고통이 서서히 사라지는 감각에 집중한다.

그렇게 나는 매트 위에서 아픔 앞에서 의연해지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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