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야너두 요가 가르칠 수 있어
점심을 밖에서 사 먹을 시간 따위는 없다는 지난주의 교훈으로 참치컵밥을 싸들고 요가원으로 향한 나.
같은 깨달음을 얻으신 ttc 동기님들과 함께
오손도손 모여 점심을 먹었다.
사람들과 모여 앉아 도시락을 까먹는 게
정말 오랜만이라,
정겨움을 느끼며 아무와도 나눠먹을 수 없는 도시락을
(주먹밥이 아닌 퍼먹는 개밥이라...)
우적우적 먹었다.
실기수업 선생님께서는
아사나를 대하는 마음가짐을 가르쳐주셨다.
0부터 10까지 얼마나 아파?
요가할 땐 나를 살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5 이상으로 아프면 덜 해야 한다고.
(하지만 대근육 쓸 땐 고통 100이어도 참아야 한다.
아파도 무릎 90도 유지하세요.)
내가 무리하고 있진 않은지,
날 매몰차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들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는 것이다.
몸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다치게 된다.
마음도 그런 것 같다.
내가 내 마음을 잘 안다고 생각하며 살지만
사실 잘 모른다.
의식적으로 들여다봐야만 어떤 상태인지 안다.
마음이 아프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쉽다.
평소엔 그 존재도 잊고 있던 네 번째 발가락이
책상다리에 꺾이면...! (발가락 중에 제일 존재감이 작은 것 같아 네 번째를 골랐다)
온종일 아픈 발가락을 신경 쓰는 것처럼.
반대로, 아프지 않으면 그 존재를 잊고 살게 된다.
마음은 계속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데,
바쁘다바빠 현대사회에서는
그 목소리가 안 들리기 마련이라서
시간이 갈수록 들여다보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난 여기에 재능이 있다.
내가 '내 마음 안 듣기 장인'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내 친구 덕이었다.
그는 내게 벌어진 하루를 들을 때마다
'그래서 어땠는지' 물었다.
매번 근사한 답을 찾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정말 느낀 게 없었으니까.
그냥 '좋았다', '나빴다'라는 말로
퉁쳐질 만한 감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친구에게 답해줄 말을 찾다 보니
사소한 것에서도 내 감정을 찾게 되었다.
"그 아이가 날 보면서 웃는 게 뭉클했어."
"그때 누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해서 기분이 상했어."
뭉뚱그려졌던 감정이 각자의 선명한 모양을 드러내자 오히려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요가 수행 중 하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나'와 '불변한 나'를 분리해서
계속해서 달라지는 나의 상태(분노하는 나, 슬퍼하는 나, 들뜬 나 ... 등등)에 동화되지 않고
한 발짝 물러나, 나를 관조하듯 보는 것이라고 한다.
내가 순간순간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던 것이
나를 관조하게 만드는 장치가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어떨 때 기분이 나빠지는구나,
난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하나씩 펼쳐보면 마음은 마치 투정 부리던 어린아이가 이해받은 것처럼 조용해진다.
이런 습관은 만사 무던해진 내가 다시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말인데,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요가는 5 정도의 고통을 주면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게 아닐까?
정녕 명상을 오래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괴상한 자세를 한다고?
어려운 아사나를 하면 모든 의식이 몸으로 가서
잡생각을 물리치긴 하지만…
가끔 요가인들은 마조히스트가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지독하게 수행한다.
나 또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고통 뒤
후굴의 신세계를 맛본 뒤에 계속해서 무리하니까…
하지만 나 스스로가 믿을 수 있는 존재여야
날 믿고 수련할 수 있는 법…!
몸 안 다치면서 지도자과정 수료하는 게 목표라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모두들 마음 잘 돌봐가면서 5까지만 고통스럽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