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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동네 찾기

되는 대로 나가살기 : 동선동과 상도동

by 도시관측소
언제부턴가 새로 옮길 동네를 찾거나 동네답사를 하며 이곳이 나의 동네가 될 수 있을까 상상할 때 유심히 보는 몇 가지 조건이 생겼다.


Written by 김운효 / 도시디자인공장



독립하면 독립된 인간이 되는 줄 알았다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 진지하게 자취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궤도의 삶을 충실히 따라왔는데 거듭 실패만 하는 것 같았고 계속 이럴 거라면 하고 싶은 일이라도 하면서 실패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하고 싶은 것 1순위는 자취였다. 20대의 성인되기는 두 번에 걸쳐야 다다를 수 있는 것이었는데 스무 살의 성인됨이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취업을 준비할 때의 성인되기는 어디선가 날 받아주겠다고 해줘야만 얻어지는 것이었다.


부족한 건 알겠는데 어디서부터 채워야 할지가 막막해서 우선 안락한 부모님의 집에서 나와 독립적으로 살아야겠다 생각했다. 25살 생일에 자립을 하겠다,라는 다짐을 불쑥하고는 부동산으로 향했다. 모아둔 돈 100만 원을 보증금으로 하고 월세는 알바를 하며 낼 생각이었다.


뭘 봐야 하는지도 모른 채 흘깃 집을 봤다. 남의 집을 자세히 보는 게 민망해 "벌써 다 보셨어요?"라는 질문에 고개를 푹 숙이고 그렇다고 했다. 보증금 100만 원으로 갈 수 있는 집은 그 집 밖에 없었기에 선택지도 없었다. 그 집은 1층이었고 모텔촌이라 밤늦게까지 오토바이와 취한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무엇보다도 1층이라서 그런 건지 무허가 건축물 같은 집의 매무새 때문인지 바퀴벌레가 정말 많았다.


대학과 가까운 곳도 아니고, 자주 가보지도 않았던 동선동에 터를 잡은 건 순전히 성북구에 살기 위해서였다. 당시 무중력지대(지금의 청년오랑)가 서울에 몇 곳 있었는데 성북 무중력지대는 유독 재미난 활동이 많았다. 동네 주민이 되어 그 활동들을 하고 싶었다. 나의 라이프스타일이라 할 만한 것도 딱히 없던 때였다. ‘누구와 어울릴 수 있는가’, ‘어떤 동네와 가까운가’가 살고 싶은 곳을 결정했다. 나는 무중력지대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고 좋아하는 성북동과 혜화동이 가까워 동선동을 선택했다.


좋았다. 내가 간섭하지 않는 한 누구도 내 일상에 간섭하지 않았다. 밤늦게 들어와도, 늦잠을 자도 나만 아는 일이었다. 그러다 문득 사무치게 외로웠다. 집에 올 때 “왔어?” “밥은 먹었어?”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매일 오늘은 늦게 들어갈 것 같다고,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게 좋을 줄 알았는데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무지 따뜻한 일이었던 거다.


알바나 하며 살겠다고 생각했지만 당연히 그 세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매일 밤 난 잘하는 게 없어, 류의 자책이 이어졌다. 그렇게 세 달이 지나고, 패배를 인정하는 씁쓸한 심정으로 본가로 돌아갔다. 이불속에서도 틈틈이 등장하던 바퀴벌레 때문이었는지, 처음 느껴본 외로움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알바로 번 돈 70만 원 중 43만 원이 이런 집의 월세로 빠져나가는 것도 아까웠다.


실패한 자취 패잔병은 다음을 기약하며, 거봐, 하는 가족들의 반응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복귀했다.



누가 자기 집에서 살아도 된다고 했다


동선동에서의 자취가 실패로 돌아간 지 2년쯤 되었을 때다.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근처 상도동에 친한 후배의 딸이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몸이 안 좋아져 본가로 돌아간단다. 그 사이에 집이 비어 세입자를 구하고 있는데 잘 구해지지 않아서 근처 학교에 다니는 내가 다음 세입자가 들어올 때까지 살아도 된다는 거였다. 학교까지 걸어서 30분이면 가는 거리인 데다 학부 때 설계스튜디오에서 다뤘던 곳이라 나름 익숙한 동네였다.


언제 나오게 될지도 모르는데 짐을 꾸려서 사는 게 더 번거로울 거라고 하는 말들을 뒤로한 채 신이 나서 그곳에서의 삶을 상상했다. 로드뷰로 동네를 쭉 스캔한 뒤 여기에 살면 시장에서 반찬을 사고 근처 국사봉공원도 산책할 거라고 다짐했다.


친구와 동네 답사부터 했다. 계단이 정말 많은 동네였다. 그렇게 도착한 집은 옥상이었고 꽤 낭만적이었다. 옥상에서 텃밭을 가꾸고 가끔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빨래도 여기서 말리면 바싹 마를 것 같았다.


집에서 국사봉 공원까지 10분 거리라는 걸 발견하고 나서, 숲세권에 살게 된 행복을 어떻게 누려야 할지 생각했다. 매일 아침 그곳을 산책하겠다는 계획은 결국 이루지는 못했지만. 경기도에서만 살던 내게 지하철이 아닌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집에 갈 수 있다는 건 그 선택지 자체로 낭만적이었다.


서울대입구 근처에서 운동을 끝내고 밤늦게 집으로 걸어가던 길은 아직도 선명하다. 내가 모르는 서울의 모습들. 서울은 언덕이 참 많구나. 서울의 주택들은 어쩜 이리 모양이 다를까. 하며 곳곳을 사진으로 남겼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며칠사이에 안정을 찾아갔다. 학교와 가까워지면서 확보한 시간에는 6시에 열리는 요가소년의 스트리밍을 들으며, 학교까지 걸어갈 때의 활기찬 생각들. 사람들로 빽빽한 지하철이 아니라 걸어오니 땀은 좀 나도 절로 활력이 났다. 돌아오는 길도 처음엔 무서운 것 같더니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매번 다른 길로 와본 끝에 우리 집으로 오는 가장 빠른 경로를 알아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이 나갔다. 6개월은 더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마음을 써서 청소하고 인테리어 한 공간이 썩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곳에 산 시간은 딱 일주일이었다.


원래도 내 집이 아니었기에 달리 할 말도 없었다. 당장 할 일은 눈치 없이 어제 도착한 조립가구와 함께 짐을 재빨리 빼주는 것이었다. 연구실의 안 쓰는 원형 탁자도, 친구가 빌려준 1인용 매트리스도, 제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이렇게 집이 빨리 나갈 줄 알았다면 그 집에 가지 않았을까? 합리적으로는 그게 맞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될 줄 몰랐고 지금은 설렜던 그 시간, 서울에서의 나의 삶을 꾸려간 시간이 애틋하다. 그리고 당시의 경험으로 어디에, 얼마나 머물던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라이프스타일이 생겼다. 아침에는 요가를 하고 요가를 마치면 요거트를 먹으며 나를 위한 시간을 잠시라도 마련하는 것.


이런 습관은 새로 생긴 동네에 좋은 요가원이 있는지를 꼭 확인하는 체크리스트가 되었으니 일주일의 자취가 꽤 오랜 자취를 남기는 셈이다.



* 이 글은 2025 도시관측 챌린지 활동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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