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김운효 / 도시디자인공장
작은 가게, 작은 공원, 작은 집, 작은 산책로에 내재된 힘을 계획으로 더 크게 구현해 보고 싶습니다.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어은동에서의 하루를 정리해보려 합니다. 아직 추워지기 전 어느 가을날, 드디어 어은동을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날을 오래 기다려왔고 제게 너무 중요한 일정이었기 때문에 미팅 날짜만 확정된 상태에서 12시부터 6시까지 어은동에 머무르기로 했습니다.
PM 12:00, 조금 일찍 도착해 카페에서 미팅 자료 살펴보기 (@카페 프리앙)
PM 13:30, 어은동 사람들 만나기 (@안녕센터, 사랑담은 식당, 재작소, 윙윙)
PM 14:00, 동네계획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 (@더 비블리오그라피 서점)
PM 15:30, 미팅을 마치고 어은동, 궁동 천천히 둘러보기 (@우분투 책방, 어은동, 궁동의 거리)
PM 18:00,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구상하기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어은동과 연결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어은연립의 입주자 모집 공고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어은연립 멤버들과 인사하고 집을 둘러보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안녕센터에서 어린이건축학교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안녕센터까지 가는 1분도 안 되는 시간에도 여러 번 아는 사람들을 마주쳐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대표님께 여기는 원래 이런 곳인지 물으니, 오늘 반가운 사람들을 유독 더 마주친다며 내가 오늘 오길 너무 잘했다고 하셨습니다.
참고로 어은동은 '안녕마을’이라고도 불립니다. 안녕, 인사하며 지내자고 만든 마을. 곳곳에 안녕마을 그리고 상생가게라는 작은 표지가 있습니다. 매년 10월에는 안녕축제도 열립니다.
안녕센터 앞 광장에서는 어린이건축학교를 운영하는 청사진 대표 상호님이 '놀이터 뚝딱원정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준비하기 위해 모인 멤버들과 인사하는데, 나를 '동네계획하려고 하시는 운효님’이라고 소개하니 다들 미리 얘기를 들으신 듯 자주 보자며 반가워하셔서 이곳에서의 생활이 벌써 기대되었습니다.
어은동에서 스몰 비즈니스가 관계 맺는 방식은 조금 특별합니다. 가게, 소규모 회사 등 동네 기획사 윙윙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데, 윙윙이 운영하는 코워킹 공간에 입주해 있거나(청사진연구소, 우당탕탕 스튜디오, 로잇스페이스), 윙윙과 여러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다가 자기만의 스몰비즈니스를 시작했거나(소수, 어라운드, 재작소) 하는 등입니다.
어은동에서 먼저 비즈니스를 시작한 창업 선배들은 관계를 맺고 사업을 발전시킨 노하우를 알려주며 동네의 창업 생태계를 순환시킵니다. 관계를 연결하고 창업 컨설팅을 하는 구심점 윙윙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뭔가 해보려는 후배들은 선배들이 다져온 관계망, 비즈니스 노하우를 기반 삼아 자기만의 커뮤니티 비즈니스를 시작합니다.
이런 어은동의 생태계를 만들어낸 윙윙, 그리고 유사한 방식으로 지역에서 활동하는 조직들의 비즈니스 모델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윙윙(대전 어은동)과 퍼즐랩(공주 제민천), 서울에서 활동하는 한국리노베링, 어반플레이가 어떻게 지자체와 연계해서 사업을 수주하고 있는지, 공공 부문의 비즈니스 모델을 살펴보고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공간들과 민간 부문 비즈니스 모델을 정리해 봤습니다.
윙윙: “동네” 기획사
먼저, 내가 가장 관심 있는 윙윙은 아래와 같이 비즈니스 영역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 자체 운영 공간: 윙윙이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공간은 카페와 코워킹스페이스입니다. 지역관리회사에 있어 운영하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지역의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거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어떤 행사를 기획할 때 상시 준비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나처럼 협업 문의를 하거나 윙윙, 어은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캐주얼하게 맞이할 수 있는 공간도 카페입니다. 코워킹스페이스는 로컬 창업자, 창작자, 문화인이 모여 각자의 일을 하며 협업할 수 있는 곳입니다.
2. 창업교육과 일자리 발굴: 이 사업은 주로 지자체의 사업 수주와 연결됩니다. 흥미롭게도 윙윙, 리노베링이 유사한 지점에서 공공 과업을 수주하고 있는데 '지역기반 교육’이라는 것으로, 단순한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라 지역의 창조적 플레이어들이 서로 연결되고 집중적인 프로그램을 통해 변화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3. 지역 맞춤형 공간 조성을 통한 커뮤니티 활성화와 비즈니스 모델링: 윙윙이 잘하는 창업 역량 강화를 지역에 더하는 것입니다. 이 지역에서 뭔가 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지역에 필요한 공간을 제안하거나(문화적으로나 활기 측면에서) 브랜딩을 도와주는 방식입니다. 커뮤니티 활성화는 주로 활동으로 나타나므로 매년 열고 있는 안녕축제가 그런 역할을 합니다.
최근 윙윙은 글로컬 상권 창출 사업에 선정되어 "성심당의 빵"이라는 지역 콘텐츠를 활용해 세계인이 찾는 '글로컬 베이커리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한다고 합니다. 골목상권 내 앵커스토어를 집중 육성하고 지역 주민, 건물주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협업을 통해 젠트리피케이션을 방지하는 자율상권관리모델까지 이어지도록 지자체와 함께 지원할 예정입니다.
4. 동네자산화: 윙윙은 건물 2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윙윙의 사무실 겸 1층 카페, 유사한 사회적경제 중간지원조직이 입주한 건물이고, 하나는 내가 들어가려고 하는 어은연립입니다.
퍼즐랩: “마을” 경험 설계회사
1. 자체 운영 공간: 게스트하우스 ‘봉황재’, 카페 ‘체스넛프렌즈’, 마을스테이 안내소 겸 와인바 ‘크림’, 셰어하우스 ‘버드나무빌’, 코워킹스페이스 ‘업스테어스’, 청년창업실험공간 ‘노인회관’, 커뮤니티호텔 ‘슬로크루즈’
2. 마을 경험 프로그램: 마을 투어, 체험 및 프로그램 등 제민천을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 제공(마을스테이 여행, 체험 프로그램 개발). 이런 프로그램, 투어 기획력을 바탕으로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사업을 수주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3. 다른 지역의 상권 활성화 관련 프로젝트 수주
한국리노베링
한국리노베링은 로컬의 잠재자원을 활용하여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전략연구, 교육컨설팅 기업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지역관리회사보다는 지역에 대한 전략 수립 역량을 높이고자 하는 지역관리회사의 컨설팅 기업에 가깝습니다.
1. 자체 운영 공간: 스튜디오 '시보’를 사무실 겸 코워킹스페이스로 운영
2. 교육(창업 컨설팅 및 지원):
자체 브랜딩 ‘리노베이션 스쿨’(지역 기반 창업교육 및 실험 프로그램): 다양한 지역에서 운영하며 교육 대상, 방법 등을 변주하여 운영
공공에서 수주하는 지역기반 창업생태계 조성, 지역혁신 창업가 지원사업 등 운영
3. 연구: 로컬크리에이터, 지역상권 관련 연구 수행
4. 출판: 아카이브집, 사례조사 및 분석보고서 출판
5. 공간 기획: 주된 업무는 아니지만 민간의 유휴부동산에 대해 활용방안을 기획하고 제안하는 일도 합니다.
번외: 어반플레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하드웨어라고 명확하게 정의해 나가던 시점에 소프트웨어로 본인들의 업역을 정확하게 정의한 어반플레이를 보니 신기했습니다. 자체 운영 공간만 20개가 넘고 기획력이 뛰어나다 보니 공공에서 발주하는 다양한 기획 및 운영, 디자인 등 자료집 제작 일도 많이 수주하는 것 같습니다.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기업들을 정리해 보니, 지역관리회사라고 할 수 있는 회사는 윙윙과 퍼즐랩 두 곳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수익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
둘째, 회사의 기반이자 장점을 살려 비즈니스로 발전시키는 것(윙윙은 창업생태계 강화, 코워킹스페이스 운영에 포커스, 퍼즐랩은 관광 분야에 오래 있었던 권오상 대표의 역량으로 투어 및 프로그램 기획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셋째, 이런 장점과 자체 운영공간으로 로컬에서 쌓은 존재감으로 공공에서 사업을 수주하는 것입니다. 수주하는 사업은 기존 사업과 관련되어 있는 듯하면서도 공공의 필요에 따라 다양합니다.
내가 구상한 동네계획의 실행 방식은 윙윙이 일주일 동안 머물며 오래 이야기를 나눈 파리의 15분도시 연구실(그 유명한 까를로스 모레노 연구실!)이 생각하는 15분도시 생활권 계획과 놀랍도록 일치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동의한 또 하나의 핵심 아이디어는 생활권 계획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동네계획은 사용자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과 15분도시 연구실이 그리는 15분도시가 결국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주민의 시간사용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그랬습니다. 윙윙의 생활권 계획에도 일상의 라이프스타일이, 그 주인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맥락에서 사람이 중심이 되는 생활권 계획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15분 도시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6가지 기능을 충족합니다:
거주하기(Living)
일하기(Working)
(재화나 서비스를) 공급하기(Supplying)
돌보기(Caring)
배우기(Learning)
즐기기(Enjoying)
같은 맥락에서 15분 도시라면 아래 여섯 가지 간의 이동이 최소화되어야 합니다:
집 ←→ 오피스 ←→ 레스토랑 ←→ 공원 ←→ 병원 ←→ 문화시설
우리는 생활권 계획의 베이스캠프를 어은동으로 삼습니다. 이곳이 가진 자산 중 하나는 커뮤니티 성격을 가진 비즈니스입니다. 커뮤니티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플레이어들은 각자의 장소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들은 공간에서 연결되고, 관계로 연결됩니다. 이들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연결하고 머무르고 미래를 제시하기 위해 생활권 단위에서의 구상이 필요합니다.
점으로 존재하는 커뮤니티 비즈니스를 선으로(관계로), 면으로(생활권 단위 계획으로) 연결하는 것이 동네계획이 할 일입니다. 저층주거지라는 물리적 환경, 대학가와 인접해 있어 청년들이 많다는 조건, 커뮤니티 비즈니스가 다른 지역에 비해 활발하다는 조건은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동네계획사무소가 어은동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이곳에 살듯이 머무르며 찾아 나서기로 했고, 그전에 어떤 프로젝트를 같이 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서로 초반에 너무 많은 기회비용(에너지이든, 돈이든, 시간이든)을 쏟지 않고 멤버십과 협업의 방식을 다지는 차원에서 부담 없이 시작하기로 합니다. 사람 - UX디자인 - 행정의 언어 - 도시계획이 모였을 때 무엇이 만들어질지 기대됩니다.
이번 공부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남깁니다. 내가 가진 역량이 회사의 비즈니스로 자리매김한다면 나는 어떤 역량을 갖고 있는가(또는 갖고 싶은가)?
출판, 연구, 프로그램 기획, 공간 기획, 창업 교육 등 특화할 수 있는 영역은 다양합니다. 동네계획사무소는 어떤 것에 탁월성을 가져야 할까요?
나는 하나의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싶은가(윙윙, 퍼즐랩), 혹은 내가 가진 툴을 기반으로 여러 지역에 방법론을 확산하고 싶은가(한국리노베링)?
윙윙과 퍼즐랩은 지역을 기반으로 나름의 성공사례를 구축해 다른 지역에 방법론을 이식하고 있고, 한국리노베링은 위치한 연희동을 기반으로 서대문구, 연희동의 사업들을 수주하고 있으니 답은 없지만 시작 단계에서는 해볼 만한 질문입니다.
나는 여전히 소프트웨어가 잘 구축되어 있는 지역(상권이 잘 구축되어 있는 것도 좋다)에서 하드웨어를 잘 구축하는 경험을 만들고 싶기 때문에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싶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동네를 기반으로 활동한 동네건축사사무소 사례를 공부해 볼 계획입니다. 당장 생각나는 것은 블랭크와 도시공감협동조합, 최근 활발한 윤주선 박사님의 활동 등입니다. 이렇게 동네 기반의 활동을 기록하다 보면 함께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동네 연구, 아카이빙인데 오늘 큰 감명을 받은 구가도시건축의 ‘픽션논픽션’ 전시, 서울역사박물관의 생활문화자료조사, 동네연구소에서 진행하는 권역별 도시공간 기록화 사업도 살펴봐야겠습니다.
기회란 얼마나 우연히 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은연립에 입주 신청서를 내던 그 시기에 윙윙에서는 생활권 단위에서의 프로젝트를 구상하며 각자의 영역에서 할 일을 구상하는데 빠진 한 조각이 도시계획을 아는, 생활권을 공간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플레이어였다고 합니다. 나의 ‘무턱대고 해보자’ 식 마인드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과연 자신 있게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경력에 대한 의구심은, 아무도 이 일을 시도해보지 않았으므로 내가 '동네계획’에 있어서 퍼스트펭귄이 되어 꼭 들어맞는 경험과 역량을 쌓으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정말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저층주거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회사에서 했던 첫 번째 프로젝트가 저층주거지라서 그랬다기엔 이 관심과 마음은 꽤 미래지향적이었는데, 저층주거지가 분명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작은 가게, 작은 공원, 작은 집, 작은 산책로. 이 작은 것들이 연결되어 만드는 힘이 분명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동네계획사무소라는 구체적인 형태를 떠올리기 전부터 나의 커리어적 목표는 '작은 것들의 힘을 계획으로서 구현하는 일’이었는데, 내게는 이 날의 미팅이 저층주거지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인정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저층주거지가 가진 잠재력을 어떻게 발휘할지 고민하는 일은 멈추지 말아야겠습니다.
* 이 글은 2025 도시관측 챌린지 활동으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