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0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건축학과에는 '작업실'이 있다

공간을 나눠쓰는 우리의 생존 방식

by 도시관측소 Mar 11. 2025

Written by 현자연


작업실에서 12명의 선후배와 생활도, 놀이도, 공부도, 작업도 같이 한다. 철저한 규율을 위해 호칭은 나이가 아닌 학번으로 정해진다. 그리고 자기 방은 없다. 여긴 낭만과 군대 사이, 그 어디쯤에 있다.




건축학과에는 '작업실'이라는 특별한 문화가 있다. 일종의 셰어하우스인데, 건축학과 학생만 입주할 수 있으며, 1학년에 들어와서 5학년까지 중간에 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선후배가 함께 생활과 작업을 하는 공간이라고 보면 된다. 학교 차원에서 운영하는 것은 아니고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것인데, 동아리도 아니고 아지트도 아니며 일반적인 설계실의 개념과도 조금은 다르다.


홍익대학교 세종캠퍼스에는 풍경, JJ, OM, 봄여름가을겨울 4개의 작업실이 있으며 그중 내가 생활한 봄여름가을겨울 작업실은 유일한 혼성작업실이다. 나머지 셋은 남자만 입주 가능하다.


주거비는 연세를 n분의 1로 다 같이 부담하며, 내가 있을 때는 60평 정도의 상가건물 한 층을 통째로 빌려 13명 정도가 생활했고 생활비로는 10만 원을 걷어 물값, 전기세, 가스비, 평일 저녁 식비를 부담했다. (현재는 2개 층을 빌려 사용하는 공간이 100평으로 넓어졌으며 월 생활비 또한 상승했을 것이다.)


매주 회의와 청소를 하고 청소구역/밥하는 요일/장보는 순서를 모두 당번을 정해 작업실을 운영한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만 고생하면 나머지 날은 남이 차려주는 밥을 먹을 수 있다.


다 함께 답사는 물론이요, 방학에는 워크숍을 하는데, 방학 2주 동안 학기 복습이나 예습을 하는 것이다. 도서관에 가서 건축사 책을 모두 뒤져보기도 하고, 건축가의 작품을 모형으로 따라 만들기도 하고, 지난 학기 아쉬웠던 패널을 다시 제작하면서 궁금했던 툴을 익히기도 한다.


생각해보라. 12명의 선후배와 생활도, 놀이도, 공부도, 작업도 모두 같이 한다. 철저한 규율을 위해 호칭은 나이가 아닌 학번으로 정해진다. 그리고 자기 방은 없다. 여긴 낭만과 군대 사이, 그 어디쯤에 있다.


작업실 입주를 결정한 순간부터 그 신입생은 '특별한 동생'이 된다. "대학 생활이 곧 작업실 생활이며, 작업실 밖 크고 작은 스캔들에 휘말리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긴 하지만 그건 하나의 옵션일 뿐이다. 좀 더 확실한 사실은, 이렇게 맺은 인연이 (아마도) 평생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가 생기고, 작업실이 생긴 1989년 이래로 모두가 그래왔다.


조치원이라는 낯선 곳에 뚝 떨어진 청년들의 생존 방식, 그리고 대물림. 입학하기 전에도 존재했고, 졸업하고 나서도 찾아갈 곳이 있다는 건 묘한 안정감을 준다.


생존에 가장 중요한 건 밥이다! 매주 회의에서 일주일치 저녁 메뉴를 정하고, 주말에 장을 본다. 밥당번은 세 명이 13인분을 매주 같은 요일에 하면 된다. 미역국, 된장찌개는 기본이요, 오므라이스, 피자, 초밥 같은 특식부터 마카롱, 케이크 같은 베이킹까지. 어느새 대량조리의 달인이 되어있는 학생들을 볼 수 있다. 단점은 계량을 국솥 단위로 하다 보니 손이 너무 커져서 집에서 4인분 정도는 할 수 없다는 점...


이렇게 매일 같이 밥을 먹다 보면 우리는 진정한 식구가 된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건 전적으로 우리가 먹은 음식이니, 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은 비슷한 몸을 가진 식구인 것이다. 20년 동안 서로의 존재도 몰랐던 사람들이 서서히 식구가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평화로운 도시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