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슬픔이 당신안의 슬픔에 경배합니다
최근에 리처드 도킨스와 데니스 노블 교수가 나누는 견해의 차이에 대한 영상을 흥미롭게 보았다. 과학과 철학, 그리고 생명에 대한 두 거장의 접근 방식은 분명히 대조적이었다. 리처드 도킨스는 생명체를 유전자 중심의 환원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며, 데니스 노블은 생명 현상을 전체적이고 상호작용적인 시스템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요가와 명상을 안내하고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데니스 노블 교수의 말에 훨씬 더 공감이 되었다. 그의 전체론적 시각은 내가 일상적으로 접하고 살아가는 세계관과 닿아있었고, 유전자 중심의 환원주의적 사고를 넘어 생명과 우주를 하나의 복합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방식이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뚜렷하고, 그 의견에 대한 근거를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사람들을 동경했다. 그런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보며 나 역시 그렇게 사고하려고 노력해 보았다. 그러나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생각을 명확히 정의하고, 그에 대한 근거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이 나에게는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나의 학문적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만 여겼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내 성향의 반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체적인 구조의 흐름을 읽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이다. 전체론적 세계관은 개별적인 요소를 넘어, 큰 흐름과 상호작용 속에서 의미를 찾는 방식을 강조한다. 이는 내 사고방식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김주환 교수님의 내면소통 책에서 그는 양자 물리학과 고전 물리학의 차이를 설명하며, 기계론적 세계관과 전체론적 세계관을 비교했다. 그 설명을 듣고, 내가 왜 요가와 명상, 그리고 우파니샤드 철학을 잘 이해하고 깊이 공감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나는 전체를 하나로 보는 관점, 즉 서로 다른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며 통합되는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만났던 어떤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들의 이원론적 철학이 왜 내게 어렵고 불편하게 느껴졌는지 알게 되었다.
최근에는 김환기 화가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작품을 원화로 보게 되는 특별한 기회를 가졌다. 점, 선, 색이 만들어내는 무한한 우주의 확장을 보며 경이로움을 느꼈다. 마치 그 작품이 내면의 언어를 대신 표현해 주는 듯했다. 또, 새해 첫 책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 설국‘을 읽으며, 그가 표현하고 있는 자연에 대한 묘사와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와 대화를 모두 같은 물성이라 여기고 있음을 느꼈다. 인간의 존재와 자연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롭게 얽혀 있음을 인간 같은 자연, 자연 같은 인간을 그린 문장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평생 무언가 전에 없던 이론을 만들거나 완전히 독창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 모른다. 내가 떠올리는 생각들은 이미 누군가가 했던 생각들이겠지만, 내 삶의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과 책, 그리고 영감을 준 미술 작품들이 내 안에서 하나로 융합되어 나만의 언어로 재조립된다. 이 과정은 나만의 고유한 우주 속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적 재구성이며, 통섭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들이 어떤 우주를 가지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들의 경험 속에서 어떤 삶의 방식과 사회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금의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그들이 나와 만나게 된 여정은 어떤 것이었는지 알고 싶어 진다. 단편적인 의견만이 아니라, 그들의 전체적 맥락을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그때 그들과의 연결감은 곧이어 떠올리게 해 준다. 내가 그랬듯 그들의 물성을 변화시켜 온 일들은 아마도 고통스러웠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고통의 경험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믿는다. ‘나마스테, 당신의 영혼에 경배합니다.'라는 인사를 매일 건네면서, 요즘 나는 그들의 영혼 대신 그들의 슬픔을 바라본다. 그 순간, 나는 그들 속에서 나를 본다.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매일 아침 영양제처럼 마시며, 이제는 이렇게 인사를 건넨다. ‘나마스테, 당신의 슬픔에 경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