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얼그레이스콘 Apr 07. 2021

매일약국

#마흔여섯 돌아보기 10.

‘매일약국'은 우리집 옛 약국의 이름이다. 대구 대명시장에 있었던,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열여섯 이전의 기억은 매일약국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아버지는 약사 면허를 따자마자 개업을 하셨다고 한다. 약국은 당신의 일터이자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였다. 처음에는 예닐곱 평에 단칸방이 달린 작은 규모였는데, 내가 여섯 살 되던 해에 옛 건물을 허물고 같은 자리에 2층으로 신축했다. 예전의 약국과 뒤편에 딸린 살림집 모습이 어렴풋 기억나기는 하지만, 그다지 또렷하지 않다. 내가 기억하는 약국은 신축한 매일약국이다.       


새로 지은 매일약국 건물은 백색 타일로 외장을 마감한 상가주택이었는데, 그 시절 우리 시장에서는 처음으로 들어서는 2층 건물이라 주위의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짐작도 가지 않는 부모님의 30대, 그 젊은 부부에게 얼마나 큰 기대의 공사였을지 어설픈 상상을 해본다.   

  

시장 어른들은 나를 ‘약국집 막내딸’이라고 불렀다. 나도 그리 불리기를 은근히 즐겼다. ‘우리 집과 나’를 함께 지칭하는 말이라 좋기도 했고, 우리 동네에서는 일종의 신분보장과도 같았다. 고기나 과일 심부름 같이 값나가는 물건을 아이 혼자 사러 가도 혹여 속아 사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가끔 내게 간식 하나씩 쥐여 주시기도 했다. 대형마트가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시장은 언제나 북적거렸다. 그 시장을 참 재미있게 돌아다녔지만, 엄마는 행여 자식 교육이 책잡힐까 늘 노심초사하셨다고 한다. 시장은 참, 말이 많은 동네였다.     


‘엄부자모’라고들 하는데, 우리 집은 반대였다. 특히 아버지의 막내사랑은 유별났다. 보슬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오늘은 비오니까 학원가지 말고 아빠랑 놀자”하시는 통에 엄마에게 잦은 타박을 들으셨다. 어쩌다 혼자 늦은 저녁을 드시게 되어도 항상 나를 앞에 앉혀 놓곤 하셨다. 내가 서울로 학교를 올라가게 되었을 때, 집에 놀러 오셨던 셋째 고모가 “연정이 서울가믄 오빠는 이제 우짜심니꺼”라 하시던 기억이 난다. 마흔 중반의 나이에 아직도 ‘아빠’라 부르는 건 내가 이런 막내였던 이유가 클 테다. 그렇다고 반말은 쓰는 건 아니다. 그 정도로 철이 없진 않다.     


하지만 막내로 사는 것이 항상 즐겁지만은 않았다.  형제들의 장난은 아버지의 막내사랑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심했다. 특히 무식이 서러웠다. 오빠와는 다섯 살, 언니는 두 살 차이가 났는데, 언니는 ‘빠른’이라 3학년 차이가 났다. 그만큼 지식의 차이가 컸다는 얘기가 된다. 이 둘은 주로 ‘출생의 비밀’로 나를 골렸다. ‘다리 밑 주워온 아이’란 뻔하디뻔한 거짓말에 나는 매번 속았다.      


언니가 중학교 생물시간에 혈액형을 배우고 온 날의 일이다. 아빠 혈액형은 O형, 엄마가 B형이신데, 자기네 둘은 B형이고 나만 O형이라는 이야기를,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들려주었다. 알파벳 O가 숫자 0처럼 보여서, O형과 B형이 결혼하면 B형만 태어나야 맞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친엄마 찾아간다”고 엉엉 울면서 가방을 쌌다. 그 와중에 왜 짐가방이 아니라 책가방이었는지 모르겠다. 집을 나가더라도 내일 학교는 가야할 것 같았다.


지금은 고향에서 부모님 곁을 지켜주고 있어 그저 고맙고 미안한 형제들인데, 그 시절엔 그랬다. 배운 것이 없어 그대로 믿어야 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분하다.      


약국에 대한 내 추억은 언니, 오빠와 약간 다르게 새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입시에 바빴던 그들과 달리, 나는 학교를 다녀오면 항상 약국 한편의 책상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숙제도 하고, 책도 보았는데, 특히 아버지가 모으시던 스크랩북이 재미있었다. 신문에 나오는 생활 정보나 시, 논설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웅제약에서 격주로 나오는 사보가 있었는데, 표지가 항상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서양화였다. 사람들이 다 벌거벗은 그림이라, 처음에는 야한 책인 줄 알고 몰래 봤다.      


매일약국은 그리 크지 않았다. 건평은 30평 남짓이었던 것 같은데, 1층은 약국과 식당 겸 부엌, 2층은 거실과 방 세 개, 화장실이 있었다. 우리 집은 제사도, 제관도 많은 큰 집이었지만, 그 많은 손님을 치르기에 그 집은 너무 좁았다. 당연히 2층으로 연결되는 계단에 할애할 수 있는 면적도 작았다. 주택 계단치고는 정말 가파른 계단이었는데, 나는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다 참 많이도 굴러떨어졌다. 제사나 명절 때면 사촌들이 그 계단에 일렬로 서서 음식을 릴레이로 날랐다. 마치 전쟁터에 돌 나르는 듯한 풍경이 되곤 했다.   

   

창고 겸 보일러실로 쓰던 지하실은 좀 무서웠다. 옥상도 있었다. 할머니가 가끔 들리실 때마다 옥상 텃밭을 훌륭하게 가꾸어주셨는데,  다 죽어가는 꽃나무 살리는 실력이 정말 좋았다. "봐라, 어떻노! 할매 잘하제~?"라시던 모습이 선하다. 매일약국은 우리 가족은 물론 친척들에게도 의미가 깊은 집이었다.

 

그러나 내가 고등학교를 들어가던 해 우리는 이사를 했다. 약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네에 새 집을 지었는데, 아무래도 ‘제사’가 큰 이유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의 부모님댁, 우리가 ‘두류동 집’이라 부르는 곳이다. 남겨진 매일약국은 이제 ‘약국집’이 되어, 우리가 옛 집을 추억하는 이름으로 불린다. 살림을 새 집으로 옮긴 후에도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20년 넘게 더 일하셨다. 그러다 일흔 중반에 가까워지면서 그만두셨는데, 시세보다 헐값으로 이웃에 건물을 팔았다.      


약국을 팔았다는 전화를 받고 혹시 서운하시지는 않은지 여쭤본 적이 있다. “안 부수고 그대로 살아주면 고맙지”라는 대답은, 마치 손에 쥘 때와 놓아야 할 때를 알아버린 지혜처럼 들렸다. 그 세월을 겪지 않고는 결코 깨닫지 못할 마음가짐이리라. 그 말씀대로 매일약국은 '아직 살아있다'. 가끔 인터넷 지도로 약국집을 찾아본다.


이렇게라도 볼 수 있으니 반갑다.

안녕. 매일약국.



대명시장 매일약국


매거진의 이전글 사투리는 예민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