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선생님의 <호미>를 읽었다. 신간도 아닌, 더군다나 이렇게 유명한 작가의 책을 이제서야 읽은 것은 차마 알리기조차 창피하다. 하지만 책을 덮고 몽글몽글한 마음을 어디에라도 적어두지 않으면 어딘가 탈이라도 날 것 같아, 조금이라도 적어두어야만 했다. 상사병 비슷하다 불러도 좋겠다.
박완서의 산문집은 그렇게 마음을 흔들고 지나갔다. 무심하게 툭툭 던진 듯한 문장들이 심장을 쿵쿵 치는 듯 묵직해서, 연신 아랫 입술을 깨물며 읽었다. '무심하다'고는 표현했으나 그렇게 가볍게 썼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보통 사람은 흉내조차 못할 절묘한 균형의 돌쌓기처럼, 일부러 반듯한 모양을 피한 듯한 글의 전개가 정말 너무 멋있어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사십 중반을 넘어 지극히 현실주의자가 된 나도 여느 독자의 대열에 들 수 있구나, 라는 안도감 비슷한 것이기도 했다. 원래 다른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나는 누군가의 글에 크게 공감하기도 까칠한 성격이다. 건축사를 연구하는 직업상 언제나 정보 위주의 글을 읽고 주로 옛날 책에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정확히는 확실한 각주 정보를 얻기 위해) 오래된 글들과 싸우는 입장이다. 뭐 그렇게까지 바쁘게 사나 싶으겠지만, 솔직히 학술서 이외의 책을 읽는 시간이 사치처럼 느껴질 때도 많다.
그런 내가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집에 눈을 돌린 건, 사실 아주 바쁜 프로젝트 마감을 앞두고 불현듯 감행한 현실도피 덕분이었다. 내게는 일종의 일탈이었던 셈인데, 삐딱하게 들어선 그 경로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며 책을 읽었다. 특히 '엄마, 딸, 시어머니'를 관통하는 페이지를 만날 때는 심장이 뛰다 못해 아팠다.
그렇게 마치 맛있는 음식을 아껴먹는 듯, 페이지 넘기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한문장 한문장을 아껴 읽었다. 감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내 형편없는 글솜씨를 한탄하며 다만 한 대목을 옮겨 적는다.
<우리 엄마의 초상> _p.219~225
... 서울에서 우리는 형편없이 가난하게 살았다. 문밖 빈촌의 셋방에서 엄마가 바느질품을 팔았다. ... 엄마는 학교만 우리 동네 학교를 무시한 게 아니라 우리 동네 아이들하고 노는 것도 싫어했다. 너는 근지가 있는 집안 아이다. 그건 엄마가 나를 위 동네 아이들과 구별 짓고 엄마가 꿈꾸는 딸로 묶어두고 싶어할 때마다 쓰는 엄마의 말버릇이이었다. ... 엄마는 당신이 진저리를 치면서 출분을 감행할 고장을 나에게는 마치 이상향처럼 설정해놓고 거기다가 묶어두려고 앴다. 근지가 있는 집안 아이라는 소리 다음으로 많이 들은 말로는 너는 장차 신여성(新女性)이 돼야 한다는 거였다. 신여성이란 말은 내가 서울 왔을 떄는 이미 진부한 말이 돼 있었지만 엄마에게는 못 이룬 꿈이었으니 영원히 신선한 말이었다.
...
내가 처녀작을 쓸 때, 잘 안써져서 때려치울까 하다가도 이게 만일 당선이 돼서 내가 신문에 나면 엄마가 얼마나 으스댈까, 아마 딸 기른 보람을 느끼겠지, 하는 생각이 채찍이 되어 계속 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엄마는 말년에 우리 집에와서 지내신 적이 많았는데 엄마가 오실 때마다 나는 내 책을 엄마의 손이 못 닿도록 서가 맨 위 칸에 꽂고도 안심이 안 돼 책 제목이 안 보이게 뒤집어 꽂아놓곤 했다. 엄마가 읽을까봐 겁이 났다. 내가 <휘청거리는 오후>를 동아일보에 연재하고 나서 기자가 엄마에게 인터뷰를 청한 적이 있다. 따님 소설을 읽은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엄마는 싸늘하게 원 그것도 소설이라고 썼는지, 라고 대답하셨다. 그 매몰찬 혹평은 나에게 오래도록 상처가 되었다. 나는 아마 생전 엄마를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