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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Sep 30. 2015

[포토에세이] 미션 임파서블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미션 임파서블>


내려주세요! 여기서 내려야 하는데. 엄마는 속으로만 되뇔 뿐, 자리에서 일어설 용기도, 자신 있게 말할 용기도 없었어. 뽀얀 먼지 속으로 외갓집이 희미하게 멀어져 갔어. 머뭇거리다 결국 종점에서 내리고 말았지. 굴바우 아래 누머리 나루터에서 내려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는데. 이제 나 혼자 갈 수 있다고, 엄마한테 큰소리치고 집을 나섰는데 말이지.



 버스에서 내려 십 리도 넘게 홀로 걸어오던 그 길. 길가에 늘어선 미루나무. 그들은 마치 열병식의 군인들 같았어. 흙길을 타박타박 걸어가는 내가 얼마나 초라해 보였는지 몰라. 내 키보다 열 배 스무 배는 더 큰 나무들. 하늘 우에서 어린 엄마를 내려다보며 잎사귀를 팔랑이는데. 용기 없는 못난이라고 메롱메롱 비웃는 것 같더라니까. 강변의 모래밭은 어찌나 눈부신지.


한낮의 뜨거운 열기는 햇살 가시로 엄마를 찔렀어. 큰외삼촌! 굴바우 마을이 궁금해서요, 오늘요, 저요, 그 동네까지 가봤어요. 십 리 길을 걸어와서는 한다는 말이. 용기가 없어 잠두에서 내려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고백을 차마 할 수가 없었어. 그 뻔한 거짓말이라니. 지금 생각해 보니 큰외삼촌이 그것을 몰랐을 리가! 아침에도 꽁보리밥, 점심에는 꽁보리밥, 저녁에도 꽁보리밥,

숭숭 썰어 넣은 호박이 된장과 어우러진 호박잎국. 쭈그러진 양은밥상에 둘러앉은 오빠들과 엄마를 보며 야들아! 여름에는 호박을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많이 먹거라. 더위를 어떻게 먹는다는 말이지? 큰외삼촌은 밥을 먹을 때마다 그 말씀을 잊지 않으셨어. 꽁보리밥에 된장호박잎국으로 여름 날 흔한 식탁을 차려야하 하는 당신의 가난한 형편을 어린 엄마에게 감추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외갓집 앞으로 말이지. 여기 동네 또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크고 드넓은 강이 흐르고 있어. 굽이굽이 펼쳐진 하얀 모래사장, 유리알 같은 강물 속. 나룻배를 졸졸 뒤따라오던 물고기들이 훤히 보였어, 몽글몽글한 조약돌, 물속에 들어갔다 하면 손바닥만 한 쏘가리를 척척 건져 올리던 오빠들. 강변에서 모래성을 쌓고 온 종일 놀고 놀아도 끝이 없었지. 해가 산 아래로 아쉬운 고개를 떨굴 때까지.

방학이 끝나갈 무렵, 쌍둥이가 할머니 집에 가고 싶단다. 엄마인 나는 일이 있어서 함께 갈 수 없다 하였더니 즈그 둘이서만 가겠다고 하네. 괴목리에서 무주 읍내로 완행버스를 타고 나간 후 무주에서 다시 대전에 가는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내려 대전에서 유성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유성에서는 지하철을 타야 하는, 엄마가 보기엔 멀고 먼. 할머니 댁에 수박 한 통 사서 가는 것이 임무다.

쌍둥이가 흔쾌히 동의하네. 녀석들 신났구나. 찾아가는 길을 적어 설명하고, 차비와 용돈을 챙긴 후 너희들은 완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유성에 도착했을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전화도 없고 문자도 없는 거야. 불길하여라. 아니나 달라. 너희는 이미 유성을 지나 공주에 도착했더라. 자칫했다간 서천까지 갈 뻔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엄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낯선 곳에 들어서면 때로 엄마는 어안이 벙벙해져. 길 감각이 무디어 헤매고 제대로 찾지 못하는 엄마. 그것은 용기가 없어 내려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던 어린 시절 경험이 얼음땡으로 굳어진 탓일 거라고 핑계대곤 하지. 너희가 할머니 집에 찾아 가는 길에 겪는 일들을 보노라니 어린 시절 처음으로 외갓집에 갔던 기억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지네. 그 많던 미루나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맑고 고운 강물은 어디 매에 이르렀을까. 지금쯤 너희는 처음으로 괴목리를 떠나 엄마와 동행하지 않은 첫 할머니 집 나들이를 이야기하고 있겠지. 무주에서 버스를 타고 대전을 지나 유성으로 향한 길고 험난했던 할머니 집 찾아가기 여정을 영웅담처럼 쏟아놓고 있겠지. 아니, 어쩌면 잠깐 길을 잃었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곡절은 있었으나 첫 미션 성공이야. 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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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동해시,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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