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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Sep 30. 2015

[포토에세이] 건강할 권리, 혹은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건강할 권리, 혹은>


며칠째 식사도 못 하셨단다. 숨을 내쉴 때마다 그렁그렁 바람 끓는 소리가 난다. 앉아있기조차 힘겹다. 윗 동네에 사는 한 씨 할머니가 딸과 함께 보건진료소에 오셨다. 헝클어진 머리, 건조한 입술, 입에서는 거친 구취가 풍긴다. 흐린 눈동자에서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졌다. 고막에서 측정된 몸 온도가 정상인 것이 다행스럽다. 한 씨는 소파에 눕고, 딸은 어머니를 대신하여 그간의 병과(病科)를 이야기한다. 머릿속으로 습관처럼 처방전이 스쳐 가는데, 농특법이 허용한 약으로는 어림도 없겠다. 어머니를 모시고 빨리 병원으로 가라고 해야 맞는데, 그래 봤자 이들은 병원이 아닌 집으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백 가지나 되는 약초를 담가야 하고, 고추와 옥수수를 심어야 한다. 병원에 갈 수 없으니 주사나 한 대 놓아달라고 하신다. 봄날은 누구에게는 지루하고, 누구에게는 지랄맞게 분주하다. 나는 딸에게 어머니를 보건진료소에 두고 돌아가라고 말하였다. 한 씨의 팔에 5% 포도당 수액을 꽂고 옆에 앉았다. 한 되도 아니 되는 수액으로 어머니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것은 감불생심, 끊어진 곡기를 대신하기만을 기대한다. 찬물을 부어 진득하게 끓인 밥물을 떠서 어머니의 입술을 적셔 드렸다. 아무것도 먹기 싫다, 어디가 아프기는 아픈데, 어디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고 콕 집어 말하기가 어렵네요. 와 이리 숨이 안 끊어지노.


질문에 어긋난 말씀만 하신다. 겐타마이신을 엉덩이에 주사하고, 약을 챙겨 봉투에 담았다. 밤사이 혹여 열이 나거든 119를 불러서라도 꼭 병원에 가야 한다는 면책용 권고를 딸에게 설명하였다. 한 씨는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셨다. 날이 밝았다. 전화가 왔다. 밭일을 해야 해서 일꾼들을 얻어 놓은 상태라 병원에 갈 수 없으니 소장님이 한 번 다녀가셨으면 좋겠다는 요청이다. 수액과 주사제를 가방에 넣고 길을 나섰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윗목에 놓인 작은 밥상 위로 흰죽과 까무잡잡한 메추리알장조림이 보인다. 작은 제사상 같구나. 어머니, 주사 좀 맞으시게요. 소장님, 말씀은 고마운데 맞지 않을랍니다.


병아리 눈물만도 못한 그깟 주사를 맞는다고 내 병이 얼른 낫겠습니까? 딸한테는 맞았다고  이야기할 테니 걱정마시고 그냥 내려가시라요. 어머니 그게 아니고요. 그러니까 오늘 한 번 더 맞으시면. 소장님, 아니라요. 한 씨의 거절 앞에 나는 어찌해야 하나 망설이다 풀었던 가방을 챙겨 다시 보건진료소 돌아왔다. 딸한테는 주사 맞았다고  이야기할 테니 그냥 내려가시라는 할머니의 완곡함이 난처하다. 작년에 겪은 일이 떠올랐다. 도끼로 옻나무를 쪼개는 작업 중에 손가락을 다쳤던 임 씨의 일이다. 할머니는 집에서 상처 부위에 된장을 바르고 숯가루를 바르는 등 오래된 경험치로 스스로를 돌보셨다.


그러던 어느 날 살이 썩는 냄새가 난다며 보건진료소에 오셨다. 고무줄을 풀고 헝겊으로 싸맨 상처를 열었을 때 울렁이던. 빨리 병원에 갈 것을 권유했고, 아들 내외가 내려왔다. 서울로 가셨다. 할머니는 병원에서 손가락 절단 수술을 권유받았다. 당신의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손을 저으셨다. 손가락을 끊어도 병신, 안 끊어도 병신이라면 차라리 안 끊고 병신이 되겠다는 선언을 하셨다. 그렇게 임 씨는 집으로 돌아오셨다. 다시 보건진료소에서 만난 임 씨와 나는 날마다 상처 부위에 포타딘을 부어가며 인내심을 발휘하였다.


보건진료소에서 일하다보면 가끔 의료진의 치료 계획을 거부하는 주민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건강할 권리 너머에 있는 아플 권리를 선택한 사람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유전이나 타고난 체질, 생물학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 등 건강을 결정하는 것은 수없이 많을 것인데,  그중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기 의사결정권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력은 어느 정도일까. 기역자 모양으로 굽어졌으나  그때 이것을 잘랐더라면 지금 어떻게 되었겠냐며 보건진료소에 오실 때마다 당신의 손가락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시는 임 씨. 병아리 눈물만도 못한 주사약을 가지고 어찌 내 몸을 다스리겠냐는 한 씨.


시간이 지나면 나을 것이라요, 안 나으면 그냥 죽지요 뭐!하면서 시간에 몸을 맡기겠다는 어르신들의 선언은 적어도 세상풍파 아흔 고비를 넘긴 사람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용단(勇斷)이 아닐까. 조용히 문을 닫고 돌아서 나오는 등 뒤로 함 씨의 얕은 기침 소리가 들린다. 거실에 핀 연분홍 수국이 나를 본다. 나도 너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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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괴목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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