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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Sep 29. 2015

[포토에세이] 벼랑 끝에 서 보면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벼랑 끝에 서 보면>



동네 오빠들이 경운기에 황토를 싣고, 전깃줄도 싣고, 삽이랑 괭이를 들고 새치골로 들어갔어. 산촌의 여름도 후끈하기는 마찬가지야. 풀들이 자라나는 소리마저 들릴 듯 고요하던 골짜기가 한바탕 요란했어. 마당 가득 물결춤을 추던 개망초의 모가지는 사정없이 참수되고, 엉겅퀴 꽃잎 우에 앉아 졸고 있던 나비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화르르르.


시골 빈집들이 그렇지 뭐. 문짝들은 세월의 힘에 눌려 쓰러지고, 여기저기 구멍 뚫린 창호지는 빗물이 그려놓은 얼룩이 아이들이 그린 오줌 얼룩 같아. 깜깜한 밤이면 파랑 불을 밝힌 승냥이가 문 앞에서 어슬렁어슬렁 서성일지도 모르지. 살던 사람들도 모두 떠난 그곳에,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볼 수 없는 새치골 그곳에. 사람들은 흔히 말하지.


흙이 사람 몸에 좋다고. 좋은 공기가 몸에 좋다고. 이런 골짜기야말로 사람 살리는 곳이라고. 세상 밖에서는 더 길이 없다 한다네. 큰집 둘째 오빠가 왔어. 아직 쉰 살도 안된 오빠가 직장도 내려놓고,  부지런히 모은 돈으로 샀다고 자랑하던 평 수 넓은 아파트도 내놓고, 열 평도 안 되는 쓰러져가는 시골집에 말이지. 장판 대신 흙물 바른 방에 몇 안 되는 괴나리봇짐.


땅을 침대 삼고 하늘을 이불 삼아 잠을 청하고, 산길 따라 걸으며 마음 챙기겠노라고 오빠랑 언니가 왔어. 뜨겁게 줄기차게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의 궤도를 달리던 오빠. 큰아버지! 지금요, 새치골에 가려는데 함께 가시렵니까. 그러냐? 그럼 같이 가자꾸나. 잠깐 기다려라. 옷 좀 입고 나오마. 나도 큰아버지도 말이 없네. 어르신에게 먼저 말을 건네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무슨 말을 건네야 하는지 몰라서라는 말이 더 옳겠군. 큰아버지도 내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침묵하시는 거겠지. 서먹함이 잠시, 도순아! 예! 우리 장수 죽으면 말이지, 가가 죽으면 아마 겁나게 보고 싶을 것이다. 어떻게 살거나? 큰아버지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나는 걔가 정말 보고 싶을 것이여. 장수한테 내가 잘해 준 것이 하나도 없다.


동네 오빠들한테 들었어요. 전기도 고치고, 흙벽도 다시 발라 세웠다고요. 이곳 생활도 생각처럼 만만찮을 텐데, 오빠가 잘 견디고 적응할지. 그것이 걱정입니다. 금방 가버린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요.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오른 후 차를 멈추고 산길을 걸었어. 폭염의 열기가 목덜미까지 헉헉 말아감는데 간간이 불어오는 산바람이 뺨을 감싸네.


앞뒷문 다 열어놓고 누운 오빠가 멀찌감치 보였어. 마당을 들어서며 장수야. 방에 있느냐? 앞서가는 큰아버지를 따라가다가 마당에 섰어. 몸을 일으켜 세우는 오빠를 보았네. 잤느냐? 도순이도 같이 왔다. 오빠! 안녕? 겸연쩍어. 이런 기분 처음이거든. 왔구나. 들어 와라. 건강하던 혈색은 어디로 갔나. 아이들과 놀다 헤어진 후 해가 진 모래밭에서 보았던 달맞이꽃 생각이.


땀 냄새 풀 냄새 젖어들던 그 밤, 순식간에 피었다 오그라들던 연노랑 달맞이꽃 말이야. 하얀 달밤, 뜨겁지 않은 뜨거움으로 달아올라 훅훅 피어나던 달맞이꽃, 왜 하필 그 꽃이었을까. 빌리루빈은 필요 이상으로 오빠의 몸을 에워싸고 있구나. 마주 보는 눈동자, 오래 삶은 달걀 노른자 같아. 뭐라고 말문을 열어야 하나 계산하고 있는데 말이지.


모든 지식이(내가 지식을 갖고 있기나 한가?) 무용하며 무효하여라. 황토를 두껍게 잘 발랐네. 동네 오빠들이 일을 꼼꼼하게 잘 했구먼. 앉은 키 높이만큼 덧대어 바른 문종이는 오빠의 땀과 체액으로 색 바랜 갱지 같아. 머리맡에 쌓여 있는 책 좀 보라지. 암을 이기는 치료, 암 식단 가이드, 걸을 힘만 있으면 극복할 수 있다, 병원에 가지 말아야 할 81가지 이유,


간경화-암 나으려면 바보가 되세요! 암을 이긴 한 그릇 치유 밥상, 넘어진 그 자리에 머물지 마라. 영업실적, 무엇이 주가를 춤추게 하는가, 재무제표, 생산성과 서비스 경영 등 뭐 이런 책들이 있어야 마땅한 자리에 어찌하여 저런 책들이 비집고 들어와 있는가 말이지. 우리 오빠에게 이런 책들은 어울리지 않거든. 서재 풍경이 막 도배를 마친 흙마루처럼 낯설어.


야! 너 그거 아냐? 살 수 있는 확률이 17.3%라고 하더라. 의사들한테 물으니 삼 분의 이는 수술을 안 하겠다고 응답했다며? 그러게. 오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지 뭐. 나는 잘 모르겠네. 내가 오빠한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너무 미안하다. 오빠가 어려운 결심을 하고 이곳으로 왔으니 오빠도 나도 자주 만나자. 그러면 좋은 생각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기도할게.


집안 애경사 챙기고, 대소사마다 큰아들 노릇 하더니, 그런 것들이 오빠에게 그토록 무거운 십자가였나. 항상 긍정적인 생각만 하고, 항상 즐거운 생각만 하고, 억지로라도 웃어보라는 권유가 얼마나 맥없는 위안인가 말이지. 가족 중에 암에 걸려 게다가 자연으로 돌아온 사람이 있어 말을 건네 본 사람이라면 알 거야. 무수한 우리의 말(言)들은 얼마나 부질없는지.


어떤 말도 힘을 더하지 못해요. 그저 이야기를 들어줄 뿐, 밖으로 나와서 쓸데없는 말만 하고 나왔다며 고개를 돌리시는, 아들 아버지의 굽은 어깨가 얼마나 좁고 쓸쓸한지, 그것을 바라보는 내  가슴속으로는 이미 폭포 같은 눈물 강이 넘실대는데. 평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벼랑 끝에 서 보면 알아요. 하나도 모르면서 둘을 알려고 하다 사랑도 믿음도 떠나가죠.


좋은 집에서 말다툼보다 작은 집에서 행복 느끼며 좋은 옷 입고 불편한 것보다 소박함에 살고 싶습니다. 세상 살면서 힘이야 들겠지만, 사랑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평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벼랑 끝에 서 보면 알아요. 하나도 모르면서 둘을 알려고 하다 사랑도 믿음도 떠나가죠. 세상 살면서 힘이야 들겠지만, 사랑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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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약속 <리아킴> 중에서

@적상면 포내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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