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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Apr 01. 2016

[포토에세이] 까리하다, 그 사람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까리하다, 그 사람>


우야다 이래놨능교. 요즘 젤 마이 입는다 아입니까. 우짜든가네, 단디 고치가 보내드릴끼네 쪼매만 기다리시이소. 검정 구두약 아시지예. 그걸로 이래이래 민때믄 때깔이 나온다 아입니까. 그라고예, 얇은 천을 덧대가 너무 뜨겁지 않게 다림질을 해주마 주름이 펴지고예, 받으시고 혹시 맘에 안 들면 다시 보내시라예. 고치드릴께예.


여행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 어디인가. 나에게는 계절에 상관없이 부산이다. 부산에는 바다가 있고 자갈치 국제시장이 있고 사람이 있다. 기차 타고 떠나고 싶을 때, 사람 사는 냄새가 보고 싶을 때, 힘을 얻고 싶을 때, 슬그머니 부산이 손짓하며 다가온다.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다니! 갈 때마다 익숙함으로 때로 새로움으로 감탄을 준다.


바다와 시장이 어디 부산뿐일까마는 그곳 특유의 푸근함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도시의 크기에 비하여 공격적이지 않고, 날카롭지도 않다는 생각이 선입견이라면 아직 내가 부산에서 공격당한 적이 없고, 날카롭게 찔림 당한 경험이 없는 탓에 생긴 편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차에 몸을 싣고 창밖으로 풍경 따라 흐르는 시간은 자체로 휴식이고 위로이다.


부산역에 도착하여 광장으로 내려가기 전에 아이들과 어묵을 먹는 일은 오래된 정석(定石)이다. 부산은 볼거리 못지않게 먹거리도 풍성하여 신기하고 싱싱한 해산물은 어찌 그리 많은가. 자갈자갈 부딪혀 시끄럽고 간지러운 사투리는 이국적이기까지 하여 듣고 또 듣고 싶다. 국제시장에 들어서면 단팥죽을 먹는다. 남포동 깡통시장에서 먹는 유부전골을 어찌 빼놓을 수 있을까.


탱탱한 유부주머니가 국물을 움켜쥐고 있다가 터져버려 입천정을 데고야 마는 뜨거운 맛, 가히 환상적이다. 길거리 씨앗호떡은 먹어보기도 전에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백화양곱창의 투박한 맛은 나의 필력 부족으로 설명이 불가하다. 도대체 냉면과 무엇이 다르길래 ‘밀면’인 것인가. 쑥으로 맛을 더한 밀면까지 먹는다. 부산의 즐거움은 끝이 없다.


하나 둘 부산을 알아가면서 친절한 부산 사람도 알아간다. 온라인에서 만난 부산 사람, 국제시장에서 만난 부산 사람이 그들이다. 국제시장 좁은 골목길 안으로 끝없이 이어진 점포, 그중에 단골이 된 가죽옷 가게가 있다. 오래 입을수록 부드럽고, 낡을수록 더욱 매력적인, 유행에는 덜 민감한, 그래서 가죽 제품을 좋아한다(자주 세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이유).


몇 해 전 가게 앞에 걸린 옷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섰다. 손님을 맞이하는 사장님은 별말씀이 없었다. 편히 구경하라는 뜻이었는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의 고객을 상대하다 보니 이방 관광객에게 별 관심 없다는 뜻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손님 뒤를 따라다니며 이 제품은 이렇고 저 제품을 저렇고 입살 좋은 설명이 불편했던 나에게 냉소적 불친절이 오히려 편안했다.


매장을 둘러보던 남편과 나에게 물건을 더 보여주겠다며 지하실로 안내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지상 매장보다 훨씬 넓음에 압도당했고, 바닥과 천정에 닿을 듯 진열된 물건에 놀랐고, 러시아와 일본 등 해외로 발송할 물건들이 쌓여있음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게다가 영어, 일어, 중국어, 러시아어를 넘나들며 구사하는 사장님의 유창한 다국 언변 능력이라니.


그 후 나는 몇몇 점포를 알아가면서 밖에서 보는 국제시장의 규모보다 훨씬 더 방대한 또 하나의 국제시장이 지하세계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재킷과 잠바를 주문하고 가게를 나왔었다. 털털한 성격만큼 옷도 험하게 입다 보니 소매가 나무에 걸려 찢어지기도 하고 자동차 문에 눌려 찢어지기도 하였다. 서비스 부탁이 반복되면 처음보다는 흔쾌하지 않았고, 성의가 부족해지는 다른 가게들의 경험과 달리 이곳 사장님은 변함이 없다.


며칠 전 다시 찢어진 재킷 사진을 보며 신창동 국제시장에 있는 ‘서울모피’와 사장님을 떠올린다. 물건을 받은 사장님이 전화를 하신 것이다. 우야다 이래놨능교. 요즘 젤 마이 입는다 아입니까. 우짜든가네 단디 수선해서 보내드릴끼네 쪼매만 기다리시이소. 정겨운 부산 사투리 너머로 삼십오 년 베테랑의 자부심이 묻어난다. 오래된 친절이 반갑다.


머지않아 지인의 결혼식이 있어 부산에 내려간다. 새로 고친 재킷을 입고 축하의 자리에 갈 것이다. 국제시장에도 또 가게 될 것이다. 사장님예, 그동안 잘 계셨능교? 반갑습니다. 또 오셨네예. 차 한 잔 하이소. 죄송하지만 짐 좀 맡기겠습니다. 그라이소. 이방(異邦) 객의 어설픈 사투리에 웃어주고 짐을 맡아주는, 까리하다.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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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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