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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Mar 29. 2016

[포토에세이] 아껴둔 특별한 날

<아껴둔 특별한 날>


겨우내 덮었던 이불 홑청을 뜯어 세탁기에 넣었다. 얇은 이불은 욕조에 비누를 풀어 발로 밟았다. 마당에 있는 건조대에 널고 들어와 옷장 문을 활짝 열었다. 작년에 버릴까 말까 고민했던 옷들이 여전히 걸려 있다. 버리자니 아깝고, 언젠가는 입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버리지 못하고 넣어두었던 겉옷들이 그대로이다. 굳은 마음으로 망설임 없이 옷들을 내렸다.


속옷까지 정리하여 재활용 봉투에 담아 묶으니 반나절이 지나가버렸다. ‘당신, 무슨 일이야?’ 놀란 듯이 옆에서 바라보던 남편이 봉투에 들어있는 옷(실제 입지도 않는 옷)을 더 입어도 된다며 꺼내려고 한다. 옷장에 있는 이보다 나은 것을 우선 입으라고 권하면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는 아껴둔 것부터 입으시오. 몇 차례 오고간 나의 옥신각신이 승리를 거두었다.


며칠 후, 십여 년이 넘도록 치매에 걸린 남편을 간호했던 정 씨가 보건진료소에 오셨다. 진료실에 들어서더니 봉지에 든 시루떡을 내미신다. 여느 때와 달리 연분홍 스카프까지 두르셨다. 이 고운 것을 누가 사주셨나요? 아름답습니다. 미소띤 정 씨가 아끼던 물건이었다며 감회에 젖는다. 영감님이 오래전에 사다준 것인데 ‘애끼느라’ 안 맸고, 아까워서 안 맸다는 것이다.


정 씨의 표현을 빌면, 치매 환자를 집 안에 홀로 두고 밭에 나가 농사지으랴, 아침저녁으로 돌보랴 그야말로 죽을 똥을 쌌지만, 그래도 영감을 요양원에 고려장(高麗葬)한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이 당신이 한 일 중에 가장 잘 한 일이라면 잘 한 일로 꼽아 부끄럽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진료실에서 나에게 나누어 주신 시루떡은 남편의 기일(忌日)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남편 수발하느라 고생하였으니 고운 옷도 입고, 파마도 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보니 회갑이라고 칠 남매 아들딸들이 사준 새 옷, 칠순이라고 아들딸들이 사준 새 옷이 장롱에 가득한데. 남편은 정작 그것들을 한 번도 입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것이다. 큰아들 혼례 치르고 예단으로 받은 이불, 작은아들 혼례 치르며 받은 이불도.


경운기에 실려 나간 그것들은 밭 한가운데에서 화장(火葬) 당하였다. 허망한 한 줌의 재를 바라보니 집에 있는 것들도 내가 죽고 나면 저렇게 되겠구나 싶어 정 씨는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하셨다. 애끼두었던 옷을 꺼내 입기 시작했고 애끼두었던 이불을 덮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사람들의 말대로 정 씨는 새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셨다. 파마를 하고 평소 바르지 않던 로션도 얼굴에 발랐다.


남편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새 옷이야, 심간이 편한가 베? 시집가도 되것네 등 새 옷을 입으라고 해싸서 입었더니 이제는 비난하는 소리들, 도무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지, 사람들이 농담처럼 던지는 말에 처음에는 주눅이 들기도 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정 씨는 새 마음으로 일어섰다고 하셨다. 정 씨의 말씀을 듣노라니 며칠 전 옷장 정리했던 일들이 생각났다.


남편은 직업의 특성상 소매 있는 반팔 속옷을 입는다. 비누로 세탁한 후 삶아서 다시 세탁을 반복해도 한 해가 지나고 나면 새하얗던 속옷이 누렇게 변해간다. 언젠가 특별한 날이 오면 입거나 덮을 계획으로 장롱 안에 아껴둔 옷과 이불도 생각났다. 그날을 기다리는 아까운 옷과 이불들. 남편이 죽고 나서야 입지 못한 새 옷과 덮지 못한 새 이불을 발견한 정 씨.


결국 연기와 함께 하늘로 보내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에게 아껴둔 새 날, 아껴둔 특별한 날은 과연 언제일까를 생각하였다.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지나간 날이 이미 특별한 날이었고, 지금 이 순간이 마찬가지로 특별한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정 씨의 말씀을 듣는다. 우리는 때로 오지 않은 미래의 어느 특별한 날을 위하여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아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특별히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날마다 특별하게 입고 덮을 것이라고 다짐했다는 정 씨의 연분홍 스카프가 더욱 곱다. 좋은 것을 옆에 두고도 언제인지 모를 ‘아껴둔 특별한 날’을 위하여 놓치는 것들이 어디 이뿐일까. 버려야 할 물건도 언젠가 쓸 일이 있을지 모른다며 쌓아두는 나에게 때로는 과감할 정도의 정리가 왜 필요한지 일깨워주셨다.


햇빛 쏟아지는 마당에 이불 홑청을 펼쳐 하늘에 널고, 고실고실한 봄바람에 잘 말라 햇빛 냄새나는 이불을 잡아당겨 심호흡으로 덮으며 낡은 옷보다는 아껴둔 새 옷을 입어보자고 결심해본다. 오늘이야말로 어제 아껴둔 특별한 날이라는 것을 새삼 되뇐다.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특별하게 여기며 하루를 보내는 일, 우리에게 특별하지 않은 오늘은 없다. 그래서 오늘이 더욱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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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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