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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May 02. 2016

[포토에세이] 내가 사랑해야 하는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내가 사랑해야 하는>



"소장님~ 소장님~ 소장니이이임~!" 진료실 현관문을 누군가 두드린다. 차라리 문을 잠그지 말걸 그랬나? 나는 이불을 끄잡아 땡겨 덮는다. 나 없다고 누가 말 좀 해주지. 나를 찾는 저 소리, 꿈결 같기도 하고 생시 같기도 하다. 이른 아척 달콤따신 단잠 훼방 놓는, 거기 어르신 누구시오. 아직 근무시간이 되려면 두어 시간은 족히 남았고 마능. 흘겨 뜬 눈, 부스스한 머리, 비몽사몽 일어나는디, 고새 핸드폰이 울린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같이 앉아서 놀던 곳~


동창이 훤히 밝았어라. 새들도 날고 있지 않소. 소는 언제 몰라고 그냐? 아직도 안 일어났다냐. 고개 너머 저 이랑 긴 밭을 언제 갈려고 그런다냐! 얼른 일어나야 야! 운로(雲路)의 시조가 생각나다니. 네네! 나갑니다. 나가요! 아따! 소장님은 여적 이불 속에 있었당가요? 해가 중천인디. 아버님요, 햇님도 아적 일어나지도 않았고 마능 무슨 중천이라요? 아따 소장님! 나는 벌써 한 나절 치 일을 하고 왔고만요. 요새 고추모종 한다고 괭이질을 겁나 했더니 허리도 아프요, 무릎도 아프요, 삭신이 안 쑤시는 곳이 없응게.


요새 참말로 힘들지요? 밤새 쿵쿵 앓으셨군요. 내년에는 이놈의 농사를 또 짓으믄 내가 사람이 아니네. 약 좀 간간허게 잘 좀 지어보소. 그라지요! 아버님! 한 봉지만 잡수시믄 걍 한 방에 아픈 것이 치목재로 내빼도록 쎈 처방을 하것고만요. 암만 그래도 말이지요, 아무리 먹는약이 좋기로서니, 아버님요, 식사는 잘 챙겨 드시고, 짬짬이 쉬고 몸 좀 아끼세요. 아셨지요? 소장님~ 소장님~ 소장니이이임~! 진료실 현관문을 누군가 두드린다. 차라리 문을 잠그지 말걸 그랬나? 나는 이불을 끄잡아 땡겨 덮는다.


나 없다고 누가 말 좀 해주지. 저 소리, 꿈결 같기도 하고 생시 같기도 하다. 이른 아척 달콤따신 단잠 훼방 놓는, 거기 어르신 누구시오. 아직 근무시간이 되려면 두어 시간은 족히 남았고 마능. 흘겨 뜬 눈, 부스스한 머리, 비몽사몽 일어나는디, 고새 핸드폰이 울린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같이 앉아서 놀던 곳~ 에헴. 밭은 생기침을 하는 김 씨 어르신의 겸연쩍은 속을 내 어찌 모르것오. 밤이 겁나 길었지요? 열도 있구마요. 겁나게 아팠능가보네요!


세상에나. 아, 글씨 요새 고사린지 뭔지 꺾는다고 새벽바람 쐬고 산에 좀 올라댕깄더니 감기도 걸리고 종아리에 알도 배기고. 걍, 고사리 먹을라다 내가 먼저 죽게생겼고만요. 아직 근무 시간 전이라 미안하오만, 아픈 사람이 식전이 어딨고, 공일이 어딨다요? 암요! 주사 맞고 나면, 걍 아픈 것이 웃새재로 내빼도록 찔러볼랑게요. 바지 좀 내리시시요. 그래도 말이지요, 아무리 주사약이 좋기로서니, 아버님요, 식사 잘 챙겨 드시고, 짬짬이 쉬시고 몸 좀 아끼세요. 아셨지요?


토요일 일요일이 휴무인 탓에 더욱 일찍 보건진료소 문을 열어 진료를 시작한다. 일곱 시도 채 안 되어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 월요일을 기다렸다는 듯이 마당에는 이미 경운기가 텅텅거린다. 신록이 아름다운 눈부신 오월의 농촌은 짧은 해로 분초를 다툰다. 산과 들의 나무와 풀잎이 쉴 새 없이 반짝거리며 바삐 자란다. 죽었던 송장도 일어나 도와야 할 판이거늘, 어찌 그리 늦잠이오? 푸른 잎새들이 게으른 나를 희롱하는 듯하다. 어여 일어나 저 어르신의 아픈 허리를 만져주오! 어여 일어나 저 어르신의 아픈 무릎을 만져주오!


약을 먹고 쉬어야 할 당신들은 약까지 든든히(!) 잡수시고, 삐딱 밭으로, 산으로 향하신다. 나는 삼십 년 가까이 어르신들의 오래된 퇴행성 호소를 듣고 있다. 어느날은 내가 지쳐 가고 있음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작년에도 물었고 재작년에도, 그 이전에도 자문(自問)하였었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물을 것이다. 그렇듯이 답은 없다. 스스로 내리는 결론은 언제나 그렇듯이 남겨진 자에게는 남겨진 일이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냥’이다. 그냥 하는 것이다.


대단한 사명감이나 거창한 소신 같은 것은 없다. 보건진료소에 발령받던 초년(初年)에 나는 나의 일이 너무나 작고 초라해 보였다. 이보다 더 큰 사명을 달라고, 아니 적어도 이보다는 더 큰 무슨 일을 해야할 것 같았다. 나의 일을 가소롭게 여겨 홀대(忽待)한 경향도 없지않았다는 것을 자인(自認)한다. 그러나 요즘 그것이 얼마나 큰 교만이었는지를 깨달아가고 있다. 소중하지 않은 사명이 없고, 작은 일이란 없다는 것까지. 무엇이든 결코 한만(閑漫) 한 일은 없다. 소장님~ 소장님~ 소장니이이임~! 낭군님을 언제까지 찌안꼬 있을거요?


이제 그만 나오시오. 거기 계신 어르신 누구시오. 아직 근무시간이 되려면 두어 시간은 족히 남았고 마능. 밤새 어디가 아프셨나. 저 어르신은 날이 밝기를 얼마나 기다리셨을까. 여전히 속으로 흘겨 뜬 눈, 부스스한 머리, 비몽사몽 일어선다. 문을 연다. 내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 내 마음을 다하여 붙잡아야 하는 것들, 나의 마음이 아니라 당신이 부르신 허락으로 이곳에 왔다는 사실인 것을, 나로 기억하게 하소서. 그것을 잊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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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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