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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May 08. 2016

[포토에세이] 아버지

<아버지>



- 저기... 괜찮으시겠어요?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 걱정 마세요. 이제 아버지를 마음으로 용서합니다.


졸저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출판 소식이 인터넷 뉴스를 타고 퍼져 나갔다. 그 소식은 방송국까지 날아갔고, 졸지에 모 프로그램을 촬영하기에 이르렀다. 녹화가 끝났다. 나는 ‘아버지’라는 제목으로 노랫말을 지었고, 작곡가 돈스파이크 씨가 곡을 입혔다. 국민가수 주현미 씨는 열창하였다. ‘아버지’라는 노래가 탄생하였다.


방송 출연을 계기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차라리 잊히기를 원했으나 살아계실 때보다 더 강력하게 내 안에서 출렁이는 아버지. 기억 속 아버지는 언제나 술에 취해 있다. 비틀거렸다. 악취가 풍겼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두려움 그 자체이었다. 삽작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 방에 있던 육 남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는 아버지의 고함은 도망쳐야 한다는 신호탄이었다. 우리는 뒷문을 열고 튀어나갔다. 뒤뜰에 있는 빈 항아리에 숨거나, 낡은 농기구 뒤에서 숨을 죽였다. 그 일상은 오랫동안 반복되었다.


담을 넘기 위하여 뛰어올랐다. 꽉 붙들었던 날선 함석 조각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살점은 떨어졌고, 붉은 피가 손목을 따라 흘러내렸다. 주먹 안으로 흥건히 고이던 뜨듯하고 비릿한 느낌. 어머니에게조차 다쳤다는 것을 말씀드리지 못했다. 상처는 지금까지 손바닥에 흉터로 남아 있다.


아버지가 미웠다. 몹시 미웠다. 어린 나는 아버지의 삶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고,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대항할 힘도 권력도 없었다. 아버지를 향한 분노와 미움은 날마다 쌓여만 갔다. 다정한 남편, 자상한 가장으로서의 본보기를 보여주지 못한 아버지. 일그러진 아버지 상(像)은 결혼 이후에 더 혼란스럽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부정할수록 외면할수록 가까이 다가오던 아버지.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는데도 싸움이 끝나질 않았다. 때로는 격렬한 경쟁 상대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묘한 허탈감이라니. 이는 또 무슨 조화인가.


새벽 제단 앞에 엎드릴 때면 꿈속에서라도 아버지를 꼭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너희에게 몹쓸 짓을 했구나. 얘들아 미안하다. 그 말 한마디만 듣게 되면 아버지를 용서하겠노라고 선포하였지만, 끝내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상처뿐인 지학(志學)의 시절, 어느덧 나는 이제 불혹을 넘어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앞에 서 있다.


촬영은 계속되었다. 그동안 살아온 삶의 일부를 노래의 가사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숙제이었다. 며칠 동안 고민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힘없는 아버지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힘이 세고 무서운 아버지가 아니라 고달픈 삶을 말없이 지고 가는 지극히 연약하고 작고 작은 남자. 그 한 남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토록 침묵으로 일관하던 아버지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아! 아버지! 당신의 연약함이 너무나 부끄러워 숨어야 할 방(房)이 필요했던 거였군요. 무능한 가장으로서의 부끄러움을 술로 현실의 벽을 쌓고 그 속에 숨어계셨던 거야. 그렇게 당신을 감추셨군요. 아버지는 날마다 그 빈방에 홀로 앉아 독대하며 술을 마셨구나. 짜디짠 눈물이 쓰디쓴 안주이었군요. 술잔 대신 뜨거운 눈물 잔을 드셨겠구나. 아버지를 외면하고 애써 따돌리며 고독하게 만든 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물보가 터졌어요. 나는 머리를 조아리고 가슴을 치며 통곡합니다.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니었군요. 아~ 이런!


그때는 왜 안 보였을까/그대의 무거운 발걸음/차디찬 빈 잔을 뜨거운 눈물로 채우신 아버지/그때는 나 왜 몰랐을까/그때는 왜 외면했을까(중략)


노랫말을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홀로 걷는 무거운 발걸음 위로 굵은 눈물을 떨구고, 돌아서서는 힘이 센 척 우리에게 큰소리를 치셨구나. 아! 아버지! 아버지 산소에 올라갔다. 12년 만이다. 아버지께 노랫말을 읽어드렸다.


작사 박도순

작곡 돈스파이크

노래 주현미

곡명 아버지

http://tvpot.daum.net/mypot/View.do?clipid=57682985&ownerid=NFCuTYsUzgw0


요즘 나는 날마다 아버지가 그립다. 보고 싶다. 아버지를 힘껏 안아줄 자신이 생겼는데. 너무 늦은 건 아닌 거라고 위안한다. 아버지 산소 옆에서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기다리던 방송작가가 눈물을 닦아준다.


- 소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제가 고맙지요. 안녕히 가십시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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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있는 사람(도서출판 생명의 양식, 2014. 05/06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적상면 포내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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