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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May 21. 2016

[포토에세이] 어떤 준비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어떤 준비>


"회고기를 먹으면 병이 낫는다고 하더만요." 정말 그럴까? 손가락(때로는 손바닥)만 한 물고기에 그렇게 영험한 효능이? 아니지, 내가 모르는 신비한 비밀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는 거니까. 저 어머니는 누구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까. 그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은 또 누구에게서 들었을까. 이 어머니만 저런 생각을 갖고 계실까. 아직 보건진료소에 오지 않은 어느 어머니 중에 남편의 병을 낫게 하려고 장날마다 새 옷을 갈아입고, 흙 묻은 고무신을 슥슥 걸레로 문질러 신고.


첫차를 타시고는 지푸라기에 코를 꿴 모래무지 한 꾸미를 사고 계실지도 몰라. 이런 몹쓸 호기심 같으니라고! 폐결핵과 민물고기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기생충은 어느 회사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았기에 정확한 그곳이 최종 목적지일까. 그것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도착한 그곳에 둥지를 트는 것이냔 말이다. 도대체 그놈의 정체는 무엇일까. 연구가 진행되면서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던 그 시절, 물고기는 영양을 공급하는 유일한 고단백 식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생고기를 초장에 찍어, 펄펄한 고놈을 한 입 먹는 맛이란. 알키한 고추장 듬뿍 발라 졸이고 또 졸여 도리뱅뱅이, 정구지랑 깻잎이랑 수제비 넣어 어죽 한 번 끓여보라지, 상추에 싸서 밀가루 입혀 튀겨내면 최고 술안주가 아니던가. 경운기에 크고작은 솥들을 싣고, 장작을 싣는다. 한껏 여유를 부리는 아버지는 담배를 꼬나문다.


골짜기를 울리는 경운기 소리까지 덩달아 신이 나서 목청껏 텅텅. 모내기로 지친 몸과 마음에 휴식을 충전하는 그들만의 오래된 천렵 놀이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시절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 늦게서야 알아버렸다. 그걸 그렇게 날 것으로 먹으면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더 무서운 기생충에 걸릴 수도 있당게요! 목소리를 높여가며 떠들고, 길 가던 사람마저 붙잡아 설명했었지만, 강변 사람들만의 추억과 놀이 문화마저 끊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21세기는 기생충의 시대”라는 학자들의 공론(公論)이 공론(空論)이 아니었구나. 그야말로 실감했었지.


잊혀진 줄 알았는데, 오늘 아침의 일이다. 박 씨가 ‘지종 산삼’을 캐셨단다. 산삼이면 산삼이지, 지종 산삼은 또 무엇인가. 제법 어엿한 산 약초꾼이 된 그의 까까머리는 세월만큼 길이가 자라 어깨까지 닿는다. 수염까지 기르니 산신령을 닮았다. 이제 막 세수를 마치고 나온 것이 분명하다. 투명한 햇살 사이로 덜 마른 흰 머리카락이 펄럭인다. 비누 냄새가 신선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맨발에 신은 흰고무신이 뽀도독뽀도독 꽈리 소리를 낸다. 어서 오세요~ 오늘은 산에 안 가셨군요!/


소장님! 제가 산삼을 캤거든요./ 그러세요? 축하드립니다./ 소장님한테 한 가지 물어 보려고 왔는데요. 혹시 회충약 있습니까? 아, 그 왜 기생충 약 말입니다./ 요즘 누가 회충약을 먹습니까? 회충은 오래전에 다 없어졌다고 나라님이 선포했는데요. 그런데 산삼이랑 회충이 무슨 상관입니까?/ 산삼을 먹기 전에 회충약을 먹는 것이 기본인 거 모르십니까?/ 처음 듣는 얘긴데요. 왜 회충약을 먹어요?/ 산삼을, 그것도 지종 산삼을 먹는데, 그 좋은 기운을 회충에게 다 빼앗기면 안 되니까요./ 흠... 그렇겠네요./


…….라고 대답하고 보니. 목욕 재계(齋戒)하고, 회충약으로 내장까지 재계한 후 거룩한 산삼 의식을 치르려 하셨던 것일까. 머쓱해진 박 씨가 점점 멀어지는데, 그의 희미한 뒷모습과 나 사이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생각이. 산에서, 자연 그대로, 30년도 더 자란, 영험하기 그지없다는 천하의 지종 산삼(山蔘)도 몸 속 기생충은 못 이기나 보다. 멸시 천대로 배척받아온 기생충, 그러나 오늘도 묵묵히 자신만의 우주적 먼길을 돌고 돌아 걷고 있을 기생충들. 여전히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고, 수많은 사람의 삶을 감염자로, 혹은 퇴치자로 바꿔놓은 기회의 영물. 이른 아침 박 씨에게 새롭게 들은 산삼과 회충약의 이야기.


한동안 잊고 지냈던 기생충이 다시 생각난다. 전 국민 기생충 감염률이 5% 이하로 내려간 지금, 이제는 농담이 되어버린 ‘뱃속에 기생충’ 이야기가 다시 생각나는 것은, 한 사람이 두세 종류의 기생충을 갖고 있던 200% 이상의 감염률이 부끄럽지 않았던, 물고기와 인연을 맺었다가, 산삼과 인연을 맺었다가 다시 인류에게로 공존을 누리고 싶어 하는(!) 기생충이 나에게 던지는 과거로의 회귀는 아닐까. 보건진료소를 나간 박 씨는 읍내 약국을 돌아다녀 지금쯤 구충제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회충약을 먹지 않고 곧바로 산삼을 먹는 경우 정말 산삼의 효능은 헛방이 될까. 이 숙제를 풀기 위한 잠 못 드는 밤이 다시 온다면,

아, 나는 산삼부터 먹어야 할까, 알벤다졸부터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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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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