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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May 27. 2016

[포토에세이] 흙내와 물내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흙내와 물내>


밤새 가려워서 한숨도 못 잤다는 정옥 씨가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윗옷을 걷어 올린다. 그녀가 들어서기 십 분 전만 해도. 창밖으로는 아카시아 꽃이 솜방망이처럼 몽실거리고 향기 따라 밖으로 나가고 싶은 유혹이 치명(致命)하여, 바라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거든. 쏟아지는 초록의 빛구슬 좀 보라지. 차르르 유리알이 지긋하게 마음을 훑네. 수원에 살던 정옥 씨가 우리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은 그녀의 말대로 말도 안 되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라.


홀로 떠나온 여행길, 게다가 산에서 약초 캐던 ‘그 사람’을 약속도 없이 만나 부부의 연을 맺다니. 그날 아침 콧노래 흥얼거리며 배낭을 챙기면서 마셨던 커피가 유난히 달콤하더라니. 옷 가게를 운영했던 정옥 씨는 산골이 낯설고 두려워 결혼 후 수년간 주말부부로 지냈었다네. 주말에 만나는 무주의 하늘은 쪽빛 바다였고, 바람은 파도처럼 시원했어요. 만나는 순간 피곤을 날려주던 ‘그 남자’의 사랑과 밤하늘의 무수한 은빛 물결들.


무주가 정옥 씨를 그야말로 온몸으로 안아줬군요. 나는 그녀의 한숨도 못 잤다는 증상에 얽힌 사연을 듣기보다 그 남자와 얽힌 사랑 사연에 더 관심이 쏠려 귀를 세우고 맞장구쳤다. 산중(山中) 생활이 녹록(碌碌)했을 리가. 산에 간 낭군 기다리는 일이 지루하고 심심하기도 하더이다. 남편바라기가 되어버린 정옥 씨에게 우울증이 다가오더니, 약을 데리고 오더니, 홀로 침잠함이 많아졌더라지. 소장님! 그런데 있잖아요. 세상에나! 무주에서 처음으로 도라지는 도리지 냄새가 있고, 더덕은 더덕 냄새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예전에 그것들을 반찬으로 먹었을 때는 네 맛도 내 맛도 없었거든요. 볶아서 깨소금 넣으면 그냥 먹으니 먹는 것이었지요. 남편이 산더덕을 캐오는 날은, 그이가 마당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더덕 향기가 확 나요. 장날에 어르신들이 파는 자잘한 도라지나 더덕도 향기가 좋더라고요. 고추장만 찍어 먹어도 신기한 맛이라니까요. 봄, 여름, 가을과 겨울. 서너 번의 해(年)가 지나가니, 약도 멀어지고 우울증도 멀어져 친정에 가면 빨리 무주로 돌아오고 싶어 안달한다는, 정옥 씨는 이제 무주에 흠뻑 빠져버린 거야.


@적상면 포내리, 2016


친정아버지의 기일(忌日)을 맞아 온 가족이 모였다. 모처럼 서울까지 올라왔으니 맛난 음식 대접하겠다고 제부(弟夫)들이 서둘렀다.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한정식집이었다. 이른 봄 묵은지와 두릅, 고사리와 풋고추, 늦가을 태양초와 햅쌀에 이르기까지 공수(貢受)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장모를 위한 사위들의 배려였다. 흑임자죽이 나와 입맛을 다시고 났더니, 금방 씻어 건진 듯 싱싱한 양상추와 붉은 피망 위로 뽀얀 드레싱을 입은 샐러드는 차라리 한 폭의 그림이었다.


홍어삼합과 쇠고기 산적, 시래깃국에 이르기까지 한 숟가락씩만 먹어도 배부른 상차림이었는데, 헤어짐을 뒤로 하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한 가지 물어보자. 아까 그 음석들이 맛나더냐? 음, 뭐, 그런대로! 즈그 낯빤대기보다 큰 접시에, 나오는 음석이라고는 밤까시 만하지 않더냐. 꼴난 배추에서도 물 내, 상추에서도 물 내, 물만 매겨 키웠능가, 죄다 물 내만 나더라만. 야야! 서울 것들한테는 아뭇 소리 마라. 그나마도 다시 못 얻어먹을라.


평생 흙만 비비며 농사 짓느라 사철 바쁜 친정엄마에게 겉부신 서울 한정식의 속 내음이 딱 걸린 것이다. 나도 속은 있다. 웃음을 꾹꾹 참았다. 그것들 참말로 말똑 꼬시다. 시칠리아 북부의 아름다운 자연을 통한 마음의 안정, 햇빛에 의해 따뜻해진 신선한 공기, 이러한 것들의 욕구로 인해 떠나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을 색과 향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재스민, 프리지아, 히야신스 등의 꽃 향과 그레이프와 같은 열대과일 향, 그리고 마린 향과 우디,

 
머스크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지중해 바다의 냄새를 재현해냈다. 일탈을 꿈꾸는 향수,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아쿠아 디 지오’(월간에세이, 3월호, p. 87)! 흐르는 글 아래로 정옥 씨의 이야기가, 친정엄마의 이야기가 미소로 겹쳐진다. 산중에 살아 풀 내와 꽃 내, 도라지 내와 더덕 내에 민감, 아니 너무나 익숙한 것들. 잃거나 혹은 찾고 사는 나와 촌부(村婦)들에게는 멀어도 너무 멀게 느껴지는 아쿠아 디 지오. 일탈을 꿈꾸며 달려가고 싶다는 시칠리아 북부는 지구 어디쯤일까.


스스로 존재하는 향기를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마는 아쿠아 디 지오와 만나는 지중해 바다 냄새는 어떠할까. 무슨 풀에게 어떤 벌레에게 공격을 당했길래, 몸통에는 좁쌀 같은 홍반이 여럿이런가. 발갛게 얼굴까지 부어오른 정옥 씨. 바라만 봐도 나는 절로 웃음이 난다. 밤새 가려워서 한숨도 못 잤다는 호소는 산촌에 삶의 뿌리를 내리기로 한 정옥 씨가 겪어내야 할, 무주적응증후군이라고 명명(命名)한다. 산 아래 흙이, 풀이, 벌레들이 정옥 씨에게 친구하자고 손 내미는 중이네요.


조금 더 지켜보죠. 시간도 약입니다.

무엇보다 정옥 씨, 참 예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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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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