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호사 박도순 Jan 24. 2017

[포토에세이] 뜨겁지도 차갑지도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뜨겁지도 차갑지도>



“안녕하세요? 보건진료소장입니다. 다친 곳은 안 아프세요? 약은 잘 챙겨 드시고 있죠? 잊지 말고 내일 꼭 오세요.” 나는 간호사 면허 취득 후 일정 기간 공중보건업무에 종사할 것을 서약한 사람이었다. 간호대학 시절 ‘공중보건장학을위한특례법’에 의하여 장학금을 받았고, 삼 년동안 보건진료소에서 근무해야 하는 조건을 이행하여야 했다. 업무가 시작되고 첫환자가 왔다. 유리 조각에 손을 다친 서른두 살 청년이었다. 그의 손가락은 붉은 피에 적셔 있었다. 이십년이 훨씬 넘었지만 그날이 사진처럼 기억되는 것은 내게 ‘첫환자’였고, 봉합술을 시행한 ‘첫경험’이었던 까닭이다. 이론과 실습으로 배운 것을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호재에, 대단한 일을 드.디.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자부심(自負心)도 충만했었을 것이다.


초록 구멍 포(布)를 덮고 상처 부위를 소독했다. 마취제를 주사한 후 마침내 첫 땀을 떴다. 죽은 돼지고기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의 살점에 각진 바늘을 찔렀을 때 손끝으로 전해지던 매큰하면서도 뭉탕했던 전율은 잊을 수 없다. 한 땀 한 땀 꿰매는 동안 손은 떨리고 심장은 더 떨려서 글러브는 흥건한 땀에 젖었지만 드레싱을 마쳤을 때의 보람과 안도감이란.


겐타마이신을 주사하고 진통소염제와 항생제를 처방하고도 상처는 제대로 아물까, 약의 부작용은 없을까 염려되어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침이면, 진료소장입니다. 다친 곳은 안 아프세요? 약은 잘 챙겨 드시고 있죠? 잊지 말고 내일 꼭 오세요하며 전화로 안위(安危)를 확인했던 기억도 새롭다. 무사히 실밥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마음 졸임을 불쌍히 보신 이의 치유가 함께 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보건진료소는 궁벽한 농촌과 섬에 설치된 유일한 보건의료기관이다. 감기에서부터 두드러기, 관절통, 소화불량 등 경미한 질환에 법이 정한 약과 주사를 처방한다. 보건진료소를 이용하는 환자의 70-80%는 65세 이상 어르신들이다. 그들이 호소하는 주된 증상은 허리가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 전신이 다 쑤시고 아프다, 즉 퇴행성 근골격계질환에 따른 통증이 많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아픔을 다스려 달라는 당신들의 요구에 몇 알의 약과 주사를 처방하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업무가 익숙해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이를 먹으면 정말 저렇게 아플까’,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못한) 시간 너머에 계신 어르신들의 삶은 책으로 배운 것과 상당한 거리가 있어서 아픔에 공감하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전신이 다 쑤시고 아프다는 그들의 호소가 귓가에서 맴돌다 사라지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날마다 듣는 뻔한 호소여서 들어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고나 할까. 눈도 맞추지 않고 나이 든 탓이고, 늙어지면 다 그런 것이라는 대꾸와 처방전에는 아세트아미노펜이나 폰탈이 삼분할로 낙서 되었다. 사나흘이 지나면 습관처럼 재처방은 또 반복되었다. 듣기 좋은 이야기도 한 두 번이라고, 아프다는 이야기도 하루 이틀이지, 닷새가 멀다하고 약이나 주사를 요구하는 경우, 늙어지면 정말 저렇게 아플까, 저 말씀은 도대체 몇 번째 듣는 말인가, 나도 모르게 푸념이 생겼다. 지쳐가고 있었다. 눈과 귀와 감정의 촉각(觸角)이 점점 무뎌지고 있었던 것이다.


증상 뒤에 숨은 어르신들 삶의 모습을 더 깊이 들여다보지 못한 것과 삶의 본질에 더 다가서지 못한 것은 부족한 나의 나이를 탓할 수밖에 없다. 나는 너무 철이 없었고 너무 어리석었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나이를 대신할 것은 ‘세월’ 밖에 없음을 지천명(知天命)에 이르러서야 깨달아 가고 있다. 그래서 아팠구나,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조금씩 보이고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진정 그렇게 느끼고 있다고 나의 기분을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감정, 간호사로서 예민한 눈과 귀, 얼음처럼 차가운 지식, 펄펄 끓는 사랑은 차치(且置)하고라도. 환자 앞에 부끄럽지 않을 마음 온도는 몇 도일까를 생각한다. 다친 곳은 괜찮은지 안위를 묻던 첫환자에게 향했던 내 마음의 온도는 몇 도였을까. 날마다 듣는 뻔한 증상이라 무심히 아세트아미노펜이나 폰탈을 처방하던 내 마음의 온도는 영하 몇 도였을까.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는 노랫말이 있다. 결국, 직접 살아보아야 안다는 말일 것이다. 훗날 어르신들처럼 늙어져서 허리 아프다, 다리 아프다, 전신이 다 쑤시고 아프다는 호소를 수시로 늘어놓을 때에 나의 아픔을 염려하고 어루만져 줄 사람을 만난다면 좋겠다. “안녕하세요? 어떠세요? 그러셨군요. 약해지지 마십시오.”라고 말해 줄, 삼백예순다섯 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36.5도를 보온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기를.

.

.

.

@적상면 포내리, 2017


매거진의 이전글 [포토에세이] 어쩌다 여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