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간호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호사 박도순 Nov 15. 2017

고독은 더 깊게

바람의 초상

고독은 더 깊게


접종명 인플루엔자, 로트번호 1PIF17015, 접종법은 근육주사, 선택 클릭 클릭 저장. “네, 보건진료소입니다.” “소장인가? 아랫담 명식이 아버진디.” “오, 안녕하세요? 정말 오래간만이시네요. 잘 지내시죠?” “집사람이 새복에 일 나가서 말이지. 허리 아픈 약 좀 지다 놓으라는디 나도 다리가 아파서 말이네. 집에 좀 왔다 갈 수 있는가?” 왼손엔 전화, 오른손엔 마우스, 눈은 모니터. 접종비 7500원, 백신용량 0.5ml, 접종 부위는 삼각근, 저장.


새 창이 열렸다. 마우스를 놓고 펜을 쥐었다. 10시 20분, 김 씨 Tel. 요통 호소, 방문 요망, 메페남산 사이드! 김 씨 아내 특이사항까지 메모한 후. 오후에 내려갈게요. 혹시 독감 접종은 하셨나요?” “......” “여보세요? 아버님?” 전과 사뭇 다른 낮은 목소리가 기어들어왔다. “안 했네. 안 할라네.” “네? 여보세요? 접종비는 무료입니...” “..... 그냥... 죽어버릴라네.” 예방접종 했냐고 물었는데 그냥 죽어버리겠다는 답이 온다. 문답問答 거리가 동에서 서처럼 멀게 느껴졌다. 묘한 전율이었다. 주사 놓다 찔림 당했을 때 움찔함이랄까. “소장인가? 아랫담 명식이 아버진디.” 활기 묻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뒤잇는 낮고 느린 허물어짐.


직감이었지만 확실했다. ‘뭐지? 뭘까. 뭔가 있어.’ 예진표와 백신 한 개, 알코올 스펀지 몇 조각, 얼음팩을 아이스박스에 넣었다. 오전 진료를 마친 후 어르신 댁으로 차를 몰았다. 대문이 살짝 열려있다.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수건 두 장 흰 양말 한 켤레. 막 뽑은 배추가 왼쪽 마루에서 나를 맞는다. “바빠서 못 오것지 했는디....!(이것은 기다렸다는 말씀인 것이다), 여 앉게!” “잘 지내셨어요?” “그렇지 뭐.” “저요, 아버님께서 죽어버릴라네... 하셔서요, 깜짝 놀랐어요.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요.”


멋쩍은 듯 짧게 웃는데 맨발 등 위에, 볼록 렌즈 안경 너머 커다란 눈망울 아래에 투명한 볕이 고인다. 다리를 포개고 두 손 무릎에 얹고 등을 벽에 기댄다. 말씀이 없으시다. 배가 가끔 아프고 소화가 안 돼서 검사나 받아보자고 서울 사는 아들과 병원에 갔다. 3기와 4기 사이 좌표에서 그를 기다리던 Gastric Ca.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그의 Past History이다. 수술 후 항암 치료까지 받고 지나온 십여 년. 강남 모 병원 소화기내과 최 박사는 기적에 가깝다며 완치를 판정했다. 그에게 당부한 것은 어딘가에 숨어 있는지 모를 ‘암 기운’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 것, 면역이 약하니 사람 많이 모이는 곳에 가지 말 것, 예방주사는 맞지 말 것,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할 것.

그 중에 이 어르신에게 ‘사람 많이 모이는 곳에 가지 말라’는 최 박사의 계명이 뇌리에 꽂혔다. 그는 주치의 명령대로 결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지 않은 것이다. 굳게 다짐했고, 약속했고 실천 중인데 오일장場 발길을 끊었고, 회관 마실 발길을 끊었고, 심지어 품꾼들 끊으려고 농사 규모도 줄인 것이다. 이전에 듣지 못한 이야기를 들으며, 혹시 하며 챙겨왔던 백신 아이스박스를 슬그머니 등 뒤로 밀었다. 나는 궁금해졌다. ‘사람 많이 모이는 곳’. 많이 모인다, 많이 모인다 많이의 기준은 몇 명인 것일까.


겨울철 회관에서 어르신이 안 보여 부인에게 안부를 물으면, 장場에 갔다 혹은 볼 일이 있어 며칠 출타했다는 식의 대답은 질문 면피용 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 씨는 사람 모인 울타리에 들어오지 않는(!) 여집합 원소처럼 홀로 방에 남아 당신 집을 지킨 것이다. 나는 왜 이제야 이 이야기를 듣게 되는가. “그러셨군요, 저는 그동안 몰랐습니다. 이제 건강을 회복하셨으니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도 될 것 같은데요.” 이 어리숙한 의례적 나의 권면은 어디에 근거를 둔 기반인가. 배추 두 포기 얻어 보건진료소로 돌아오는 길. 하룻밤 사이 하늘은 주무시지도 않고 적상산에 불을 더 부으셨구나. 단풍은 활활 타는데 타지 않는 나무에게 물어보았다.


“나무야 나무야. 너희가 몇 그루 모여 있을 때 사람들이 숲이라고 부르더냐?”


고개 숙인 채 웃기만 하는 김 씨. 환자와 의료진 사이 오간 교육이라는 설명들. 십 년 가까이 바깥 출입 금한 당신 삶은 양달인가, 응달인가. 지금이라도 그를 사람들 모이는 곳으로 나오게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게 무슨 의미일까. 70~90%의 예방 효과, 만성폐질환자, 심장질환자, 혈액-종양 질환자, 항암제 등 약제에 의한 면역 저하자, 65세 이상 노인은 독감 고위험군으로 우선 접종 대상자. 백신을 냉장고에 넣는데 손끝으로 꽉 쥐었던 돌멩이를 슬그머니 놓을 때의 미세한 아리함이 나를 흔든다.  


주사침에 찔린 듯 섬뜩한 놀라움은 이유 모를 씁쓸함으로 전환되었다. 사람 자리 멀리하고 집과 밭만 오갈 뿐. 홀로 집을 지키며 그는 성장 멈춘 늙은 나이테를 껴안고 숲 떠난 한 그루 나무로 서 있다. 그냥 죽어버리겠다는 한숨 섞인 외마디가 휙 지나는 숲 바람으로 나를 찌른다. 땅 아래로 키가 자라는 어르신. 흙 속에 박제된 오래된 나무는 억새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를 만나고 나는 돌아왔다. 그는 나를 불편해 할 수도 있다. 내가 다가선다 해도 어쩌면 나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진료 처방 창에 상병 검색 아이콘을 눌러본다. ‘외로움’ 엔터. 외로움은 병이 아니라는 것인가. 검색된 정보가 없다. 당연한 결과 앞에 단일 에피소드,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징조 있는 내인성 우울증상으로 확장 짓다 실없어 보여 문을 닫는다. 만약. 만약에 외로움 예방 백신이 생긴다면, 접종명 론리인플루엔자,


코드명 IfLonelyU. 추가 접종 On, 로트 No1NoALONE. 접종법, 근육주, 최대한 깊숙이 찌를 것.

.

.

@북창리


매거진의 이전글 민이 생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