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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Nov 02. 2020

알 낳는 거시기

간호일기

알 낳는 거시기


“소장이 보낸 글짜는 너무 짜가. 우리 딸은 알아보기 쉽고로 큼직 허니 쓰거든. 그래도 자네가 보낸 거 다 읽어봤네(웃음). 소장한테 편지가 다 오다니! 깜짝 놀랬당게.” “그러셨군요 앞으로는 크게 적어볼게요.” (글씨를 보여드리니, 내 어깨를 툭 치신다) “그려 그려. 하하하.” 며칠 후 다시 방문하였을 때,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데 분위기가 시무룩하다. “어디 아프세요?” 여쭈니 대답 대신 방으로 들어가신다. 분홍 보자기를 걷으신다. “며칠째 편지가 안 와. 고장 났는게벼!” 하셨다. 팩스 트레이가 텅 비어 있다. “(글씨를 보여드리며) 종이 없어요?” 눈 한번 크게 뜨시더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 나는 보건진료소로 달려와 용지를 가지고는 다시 어르신 댁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언니가 전화하니까 잠을 잘 못 주무셧다면서요? 엄마가 꿈에 보여서요? 엄마가 아버지 걱정이 되나보다. 꿈에 나타나시다니. 히히히. 진료소장님한테 연락해놨어요.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도 알려 드렷어요. 목 아프고 감기 기운 있는 거는 소장님이 약 지어드린다고 했어요. 집에 가신대요. 아셨죠? 걱정 마시고 방에서도 옷 따뜻하게 입으세요. 몸을 따뜻하게 하면 좀 나아질 거에요. 힘든 일 하지 마시고요 식사 잘 챙겨 드세요 그리고 요양사님에게도 연락해낫어요. 아버지가 말씀하신 거는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요. 화 푸세요. 거기 날씨 흐려요? 여기는 비는 안 오는데 잔뜩 흐려 잇어요. 오늘 커피랑 샴푸 사서 보냈어요. 내일 도착할 거에요. 조심하시고 잘 계세요! 또 편지 쓸께요. 10월 19일 오후 4시 40분』


  “거기 보건소요? 침을 삼킬 때마다 목이 아프고, 머리도 아프네요. 기침 가래도 심하니 약이랑 마스크랑 좀 주시오!” 뚜 뚜뚜. 강씨 전화다. 물론 당신은 나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신다. 아니, 나의 말을 듣지 못하신다. 그저 용건만 끝나면 내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기도 전에 수화기를 내려놓을 뿐. 나의 대답쯤 듣지 못해 생기는 답답함이나 약속 없는 기다림에 가타부타도 불만도 없다. 강씨와 나는 굳이 문제라고 할 수 없는 일에 익숙해졌는데, 그것은 어쩌면 나보다 더 오래전부터 여러 모양으로 익숙해진 어르신의 너그러움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날씨가 많이 추워졋어요 지금은 비가 내려요. 바람도 불고 겨울 같아요. 요새 식사는 머랑 드세요? 국이랑 반찬도 별로 없을 것 같은데. 날도 점점 추워지니 밖에 다니실 때 조심하시고 따듯하게 입고 다니세요. 목 아픈 것은 좀 어떤지. 소장님은 다녀가셧는지. 계속 아프면 한 번 더 부탁드려 보세요. 감기가 심해지려고 목이 아플 수 있으니까요. 일요일에는 시댁 제사가 있어서 의성에 가봐야 해요. 밤 11시 넘어서 집에 도착할 것 같아요. 대문 잠그지 말고 주무세요. 입맛 없더라도 식사 거르지 마세요. 우리들은 잘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참! 요양사님 아파서 아버지한테 못 간다네요. 감기 들엇대요.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세요. 다시 편지 할게요. 감기 조심하세요. 10월 21일 오전 11시 5분』


  기다렸다는 듯 딸에게 받은 수북한 편지를 꺼내어 보여주신다. 나는 글을 읽을 때면, 글밭 고랑에 앉아 아버지와 따님 사이에 일어난 동그랗고 네모난 일상 조각을 엿보는 투명 인간이 되는 기분이 든다. 어르신은 요양보호사를 기다리다가 오지 않는다는 편지를 받고 장터에 가셨다고 했다. 논 몇 마지기 대신 부치는 읍내 이씨가 막걸리 한잔 받아줘 마시고 왔다는 것이다. 현관문 열어놓고 기다리는 강씨. 한 번 쓰면 버리는 것인 줄 몰랐다면서 사용한 마스크를 모은 두둑한 주머니를 주신다.


  “집사람이 하늘로 가버리고 첫해에는 괜찮더니, 한 이 년 지나니께 밥도 해 먹기 싫고, 만사가 귀찮네. 사는 맛도 없고 슬슬 짜증이 나.” 마루에 앉아 마당을 둘러보노라면 눈길 닿은 구석구석 반질한 광채. “이제 뭐 밤일은 물 건너갔고(웃음)! 청소해 주고 밥 좀 해줄 친구 같은 사람 어디 없을까? 보건소 딸이 좀 알아보시게.” 웃자고 하는 소리에 농 섞은 뻔한 대답. 


  “소장! 닥(닭)이 계란 까드끼 우리 집에 알 낳는 거시기가 있는디, 한번 볼껴?” 알 낳는 기계라니! 보자기에 덮여 있는 것을 처음 열어주시던 날, 셋째딸이 설치했다는 문명의 이기(利器)에 나는 얼마나 놀랐던가. “반딧불 꽁무니 맨치로 깜빡깜빡 불이 켜졌다 꺼지면 뜨끈뜨끈한 편지가 쏙 나와. 참 신기한 세상이랑께.” 복합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빛신호 기다리는 강씨, 바깥 세상 소리 못 들어도 딸의 마음 읽고 미소짓는 어르신의 안방이 작은 천국처럼 환해진다. 안 보이고, 안 들리고, 말 못하는 환자와 진료실에 마주앉는 경우, 나는 스스로 묻는다. 아, 당신과 나 사이에 흐르는 이 긴 강을 건너려면, 얼마나 많은 노를 저어야 할까요. 긴말 하지 않아도, 바람 소리만 들려도, 미리 알아들어 다가갈 수 있는, 그런 거시기가 만들어지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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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말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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