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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Dec 01. 2020

김장 신드롬

간호일기

김장 신드롬


“그렇게나 오래요?” 사나흘이려니 생각하고 시작된 문진(問診) 결과는 의외였다. 일흔아홉 살 정씨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변이 마려워서 화장실에 달려가 변기에 앉으면, 쪼로로 소변 몇 방울만 나올 뿐이라는 것이다. 변비 증상이 일주일 아니라 열흘도 넘었다니! 도대체 열흘 전에 아니, 적어도 일주일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여쭙지 않을 수 없었다. 정씨는 이십여 년 전 남편을 여의고 홀로 지내는 어르신이다. 식사는 잘하시는지, 주로 어떤 음식을 드셨는지, 배가 아프거나 토한 적은 없었는지, 스무고개처럼 질문과 답이 이어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빈속에 들기름 두세 숟가락을 먹어보기도 하고, 따신 커피를 대접으로 마시기도 했다고 하신다. 시래깃국에 거칠거칠 밥을 말아 먹기도 했는데, 어찌 당신의 장(腸)은 요동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호소가 이어졌다. 나는 아기오락스 과립 아락실을 처방할 요량이었다. 관장을 해야 하나? 어떤 간호를 제공해야 할까 망설였다. 아! 김장철! 추석과 설날을 앞두고 겪는다는 명절 증후군이 떠올랐다. 장성한 자녀들이 서울과 부산에 흩어져 살지만, 마을에서는 김장철이 시작되면 어르신들은 다양한 증상으로 보건진료소를 찾아오신다.


  채칼로 무를 썰다가 손을 다치는 일부터 절임 배추 작업장에서 종일 소금물에 젖은 채 일하고나서는 근육통과 감기 등. 산책길 논밭에서는 청과물 집하장으로 싣고 갈 배추 작업하는 외국인 근로자를 만나기도 하고, 논 가운데에 버려진 배춧잎과 마늘껍질, 고추꼭대기가 흰서리 맞은 풍경을 만나기도 한다. 주말이면 골목마다 주차된 자동차는 늘어난다.


  정씨는 김장하는 날 춥지는 않을까라는 걱정부터 배추는 모자라지 않을까 염려하셨다. 양념 준비를 위하여 장날이면 당근을 사고 쪽파를 사러 장에 가셨다. 곰삭은 멸치젓국을 끓여 보자기에 거르고, 찹쌀풀 쑤고, 황태 머리, 다시마, 양파 넣은 육수까지 내린다는 말씀 듣고 보니, 배추를 소금물에 절였다가 씻어 고춧가루, 마늘, 생강만 버무리면 끝일 것이라는 나의 김치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어르신은 점점 나이 들고, 몸은 힘들어지는데 그런데도 김치 양은 줄지 않으니, 앉으나 서나 김장 치룰 걱정인 것이다.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 뉴스라도 나오면 스트레스는 더 커진다. 급기야 염려는 소화불량과 변비라는 모호한 증상까지 데리고 나타나는 것이다. 신경성이라고 이야기하기엔 너무 쉬운 결론이어서 “걱정이 많으시군요. 어서 끝나야 할 텐데요.“라고 말씀드렸다. 김장 시즌에 자녀들이 부모님 모시고 진료실에 들어서면, “있잖아요, 제발 부탁인데요, 어머니에게 김치 맛있다고 하지 말아주세요! 그래야 일을 안 하시죠.” 우리는 웃는다. 주고 주고, 또 주고, 그렇게 주고 주고도 제대로 다 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해하는 어머니들의 가없는 사랑, 어찌 김치뿐이랴마는.


  배추씨를 심고 흙으로 덮던 늦여름부터 스트레스는 잉태되었는지 모르겠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뭉쳤다가 흩어졌다 거리 조정으로 부산한데, 씨앗은 연한 잎을 내고 늦가을 볕살에 샛노란 속살을 대견하게 채워냈다. “많지는 않아요, 맛이나 보셔!” 무심한 듯 툭 던져 주시는 정씨. 검정 비닐봉지 속 싱싱한 김장김치 향기가 코끝으로 다가오더니 진료실 가득 퍼진다. 머리 염색 후 피부가 가렵다는데, 나는 두피보다 단단하게 뭉쳤던 당신 변통(便通)이 궁금하여 안부를 여쭈었다. “아! 변비? 소장님이 준 약 먹고 괜찮아요, 괜찮아!” 환히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치신다.


  머리 가려운 것이야 똥 마려운 것에 비하면 암것도 아니지요, 아들딸이 용돈도 주고, 사우나도 데리고 가고, 사는 것이 다 그런 재미 아니것습니까? 며칠 전 세상 근심 다 짊어진 듯 수심찬 모습으로 진료실에 들어서던 그분이란 말인가. 일상은 때로 배추가 소금물에 들어가기 전 모습과 소금에 절여진 후 모습이 달라져 전혀 다른 맛을 내는 묘미처럼 맛깔스럽기도 하다. 고춧가루처럼 칼칼하고 톡 쏘게 맵다가도, 잘 어우러진 오묘한 맛을 내기도 하니 말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세계 어디든 김치가 있다. 김치는 이미 우리 몸의 일부이자 혼(魂)이 아닐까. 고춧가루가 가루로 남고, 배추가 배추로 홀로 남아서는 이루어낼 수 없는 맛. 열한 가지 넘는 양념과 버무려 스물두 가지 넘는 김치 효능을 완성한다는 하늘과 땅의 종합예술. 저병원성 인플루엔자A 바이러스가 유행을 일으킨 AI(조류 인플루엔자)와 SARS(중동 호흡기증후군) 유행으로 닭과 오리가 죽어 나갈 때, 중국 사람 일본 사람이 괴질에 드러눕거나 쓰러져갈 때, 한국 사람은 멀쩡했다는 뉴스가 떠오른다. 집집마다 맵고 짠맛은 서로 다르지만, 과학으로 정형한 김치가 코로나19 바이러스에도 강력한 효과를 발휘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믿음으로 실체를 볼 수 있다면, 발효 중 특정 유산균이 생각지도 못한 어떤 항돌연변이를 일으키게 해 달라고 부탁해 볼까. 그리하여 코로나 바이러스를 물리쳐주기를! 김장 김치를 냉장고에 넣는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극진 정성 가득한 김장김치는 냉장고 속에서 저 혼자 익어갈 것이다. 신(神)의 시간만 가미될 뿐. 바라기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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