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간호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호사 박도순 Dec 10. 2017

오래 산 죄

바람의 초상

오래 산 죄


아버지는 마흔야닯, 엄마는 서른스이. 생각해 봐라. 요즘 서른세 살짜리가 뭘 아냐. 우리 엄마는 애기 때 죽은 거나 다름없어 야. 다른 엄마들은 해가 넘어가면 다 삽작문 열고 들어가는디 우리 엄마는 영 안 오는 거라. 여덟살 때부터 불을 때고 밥을 했응게 말해서 머하것냐. 죽은 엄마한테 지금도 겁나 서운하다. 오빠는 예순아홉에 가버리고 동상은 이제 일흔하난디 저 지랄로 바람 맞아버맀으니 어쩐다냐. “누님, 누님은 보리밥도 참 잘 지었어요. 요새 젊은이는 보리를 알랑가.” 열 살 먹은 것이 하면 뭘 얼마나 잘 했을라고. 열 살 짜리한티 잘 한다고 토닥이냐. “누님은 참 당돌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욕을 해재끼면 나보다 어린 놈이 말이지, “누님, 다른 사람 원망하지 마세요. 그러면 누님이 더 나쁜 사람 된다 아입니까.” 그래싸터니,


어느 핸가 징그랍게 가물어서 모를 못 심응게 식구가 다 굶어 죽게 생겼니라. 옆집 아저씨가 그러더라. “친정 동네에 경운기가 있는 사람 없는가요. 두 대고 세 대고 몰고 오기만 하면 호스 이서 주는 일은 내가 할팅께 소리 좀 해봐요. 이대로 앉아서 죽을 수는 없지요.” 유월 유두 넘으면 모는 못 심어 야. 중간중간 호스를 이서 놓고 경운기가 탕탕탕 돌아강게 바짝 마른 논바닥으로 물이 쏟아지는디, 이제 됐어! 이제 됐어! 아이고 이제 됐네! 논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울었니라. 어린 것들도 나와서 고사리 손으로 모를 꼽고 동네 사람들도 나와서 도와 중게 좋아 죽것더라. 한쪽에서 어떤 놈들은 그 지랄하더라. “이제사 심어봤자 나락 한 가마니  건지지도 못하고 자네 술값도 안될 걸세.” 미친놈들. 넘 잘 되는 꼬라지를 못 보는 것들. 아나 쑥떡!


논 가운데 물이 철렁철렁 해징게 먼 걱정이여. 이제 살았다 싶더랑게. 그란디, 모심고 나서 사흘도 안 댕게 물이 다 빠져불고 논바닥 갈라지는디, 사람 환장하것드라. 논 느 마지기서 나락 아홉 가마니 쌀 다섯 가마니 맹글어졌응게 하늘님 덕택 아니냐. 그걸로 양식을 삼았응게 나락 스무 가마니 쌀 열 자루 안 부럽더라. 이런 얘기 한다고 누가 믿어주면 머하고 안 믿어주면 머 하것냐. 징그럽게 살았는디 저 지랄로 동상이 쓰러징게 참말로 맴이 아프다. “나, 누님 얼굴 보러 갈라네.” 와라! 누가 못 오게 하냐. 내 치마폭에서 쓰러질라고 나한테 왔는가. 동상은 맨입으로 와도 나는 뭐든지 싸주고 싶어서 마늘도 주고 쌀도 주고, 없어도 주고 또 주고 싶은 그놈의 정이 뭔지. 동상이 가버린 방을 봉게 텅텅 비어가꼬 나만 겁나 서운하다. 요새는 내가 다 서운한 거 뿐이여. 텅 빈 밭에 가도 서운하고, 큰방도 비고, 아랫방도 비고, 마당도 텅 비고, 내 가심도 텅 비어서 쇠시랑 긁는 소리가 난다.


일일군지 지랄인지 불러서 병원에 갔는디 가다마이 잘 입은 양반이 오더니, “돈 가져왔어요?” 그러길래 아니요, 그랬더니 “있는대로 내놓으시오.” 하더라. 썩을 놈들! 병원가면 왜 돈부터 내놓으라 지랄이냐. 칼만 안 들었지 강도보다 더 하드만. 사람이 먼저 살고 볼 일이지, 돈 없당게 사람도 안 주것드라. 병원이 그런 곳이드만. 아이고 무시라. 만고풍상 나만 젹으면 되는디, 동생이 먼저 죽을랑갑다. 백 살을 먹어도 똥 잘 싸고 사람만 알아봄사 먼 걱정이냐. 차라리 뒈져뻐리면 션한디, 못 할 말, 할 말 다 하지마는 동상을 이 병원 저 병원 끌고 댕김시나 고생시키면 어짜나. 그게 젤 걱정이여.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염병인지, 백살백살 지랄하는디 오래 살면 머하냐, 사람 가치가 없는디. 다 죗값이다.


고추가 다 병들어서 뽑아내고는 배추를 심었더니 좀 잘 됐냐. 배추 하나를 반으로 쪼개봉게 독딩이보다 단단허고 노랑노랑허니 알이 깍 찼더라. 고놈! 인정사정없이 소금을 뿌려봉게 싸락싸락 눈 내리는 것 맨치로 어찌나 이쁜지. 소금밭 걸어봤냐. 발바닥이 션하고 보통 간지러워 야. 밤하늘 별맨치로 반짝 거린당께. 배추는 숨이 죽응게 덩치가 사분지 일도 안 되는구만. 재우재우 건져놨는디, 내 근심은 열 배나 늘었으니 어짜믄 좋다냐. 누구는 쓰러지고, 누군가는 일어서고, 누구는 앉아있고, 세상 참 지랄 맞다. 산다는 것이 불바다 같아서 깜짝 뜨겁다. 얼음장같이 차갑다가 거 참 희한한 거여. 오래 살면 머하냐, 젤로 가치없는 기 사람이다. 오래 산 죄.

.

.

@평당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