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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Feb 26. 2018

발 없는 약이

바람의 초상

발 없는 약이


우수雨水 이튿날. 오후 세 시. 하늘은 파랗다. 햇살이 다르다. 봄이야. 나지막이 속삭였다. 덕유산 목덜미를 두르고 적상산 허리를 감아 돌더니 더운 심장으로 들어오는 이 기운. 드러나거나 보이는 것이 아님에도 분명한 그 무엇이어서 나는 지그시 눈까지 감았다. 마룻바닥 틈새에 머문 햇살이 돌비늘로 반짝이는데 몸은 젖은 솜처럼 무겁다. 그럼에도 ‘이젠 됐어. 봄이야. 오고 있잖아.’ 산 너머 저쪽 연분홍 계절의 비밀을 다 알아버린 양 마음이 들떴다. 진료실 소파에 천천히 몸을 누였다. 그때였다. 메시지 알람이 들려왔다. 잠긴 화면을 여니 낯선 번호 뒤로 사진 두 장이 따라 왔다.


사진 속 그녀 입가에 머루알 크기 맑은 물집 두 개가 있었다. 확대하여 보니 눈은 충혈되어 있다. 눈언저리 얇은 막 경계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어디이신가요? 누구신지요?” 조심스레 여쭈었다. 인천에 산다는 그녀는 “며칠 전에 고향에 갔다가 어머니가 주신 감기약을 먹었는데 이렇습니다.”라고 답했다. 무슨 약인지 다시 사진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사진에 담긴 약들은 내 처방이 맞았다. 나는 그녀의 어머니 진료기록부를 열었다. 다녀간 지 한참이었다. 포내리 보건진료소 약이 인천 서구까지 날아갔다는 사실 뭐,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 전에는 강원도 인제 모 부대 소대장이라며 전화가 온 적도 있었으니까.


봉투에 적힌 번호로 연락하였다는 그는 이병에게 발견되었다는 약에 관하여 나에게 물었다. 나는 이병의 이름을 물었다. 그의 진료기록부에 처방 내역이 없었다. 사진 속 알약으로 봐서는 머리가 아프고, 콧물이 나고, 기침이 나고, 가래가 나온다는 증상이다. 이병 어머니 진료기록부를 열었다. 감기가 영 낫지 않는다. 목이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콧물이 나고 기침 가래 나온다. 수차례 다녀간 어머니의 호소가 적혀 있었다. 이 정도면 의심에 거하지 않을 수 없다. 부지런히 모은 감기약을 군대 간 아들에게 보낸 것이다. 입가에 물집이 잡히고, 눈언저리 얇은 막 경계에 물이 고이게 만든 부작용 주범은 어떤 약일까. 처방된 약품 사용설명서를 펼쳤다.


황색 5호 알루미늄레이크, 유당수화물이 첨가된 Non-Steroid 성 해열, 진통, 항염제. 아스피린 보다 서른 배나 강력하다는 약이 범인이었다. 모든 영역의 염증성 질환에 널리 사용되는 약이다. 각종 독성시험에서 안정성이 확인되어 두통, 치통, 생리통, 신경통, 류마티스 관절염, 감기로 인한 발열 및 통증, 요통과 수술 후 통증까지 다스리는 약이다. 이 정도면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만 가지 통증을 다스리는 약이 아닌가. 그러나 약의 효능_효과보다 몇 배나 많은 주의 사항은 더욱 빼곡하다. 복용을 즉각 중지할 것을 권유한 무서운 부반응들을 읽노라면 이것이 과연 약이라는 말인지, 독이란 말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날마다 석 잔 이상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위장 출혈이 유발될 수 있다는 경고를 시작으로 ‘반드시’ 의사_약사와 상의하라는 내역을 살펴보면, 인천의 그녀가 겪은 물집과 부종은 차라리 귀여운 편이다.


증상이 없더라도 신속하게 의학적 처치를 받으라는 과량 복용 대처법까지 진통소염제 한 알이 가진 천의 얼굴. 대단한 염증에 유효하다는 안정성에도 불구하고, 너무 마음이 아파 술이라도 연일 마시는 날에는, 아무리 아파도 진통제를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인 것이다. 아스피린보다 강력한 제어권을 가졌지만, 아픈 마음 치료해 줄 자신은 없는 모양인 건가? 피식 웃고 말았다. 보건진료소에 오는 환자 하루 15~20명, 때로 50명이 넘은 27년 동안, 나는 이 약을 얼마나 처방했을까. 어림잡아 백만 건 넘는 행위이다.


어디 이 약뿐이겠는가. 그동안 별문제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수 없는 일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인지. 생각해보니, 기적 같은 삶을 살고 있구나 싶다. 절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의 처방이 어쩌다 인천까지 갔을까? 어쩌다 군부대까지 갔을까? 약들도 저마다 은밀한 작용 본능이 있어 자기 환자를 찾아가는 모양인 것인가. 인생들이 각자의 길을 가듯, 약들도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일까. 길 아닌 길에 약을 내보내는 심정은 어떠해야 하는가. 나에게 맞는 약이라고 다른 사람에게도 맞을 것이라는 발상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진료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가슴이 쭐렁거린다. 누구에게 무슨 일일까. 예상을 빗나간 일은 언제나 예외적이어서 상상을 벗어난다. 문제의 어머니와 이등병 어머니 댁을 방문하였다. 나에게 처방된 약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 그것은 매우 그릇된 사랑이니, 그 사랑 멈추라고 진언眞言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한다. 사랑에도 복용법이 있다면, 주의사항이 있다면, 사용설명서에 무엇이라 적혀 있을까. 공복에는 사랑하지 말 것, 하루 세 번, 식후 즉시 사랑할 것, 취침 전에 사랑할 것. 하루 석 잔 술 마시는 사람이라면 사랑하지 말 것. 부작용으로 입가에 물집이 잡힐 수 있고, 눈이 충혈될 수 있음. 눈언저리 얇은 막에 눈물이 고일 수 있음. 후유증으로 침묵이 나타날 수 있음. 깊고 푸른 멍이 오래 지속될 수 있음. 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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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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