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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Mar 08. 2021

늦게 갈 운

간호일기

늦게 갈 운


“저기…, 소장님은 점…, 같은 거 안 보시죠?”라고 에두른 말씀을 듣는 순간, 또 아들 걱정이구나 했다. 양력설 지나고 머잖아 음력설 쇠겠는데 쉰 턱을 넘는다는 아들. 도무지 결혼할 생각을 안 하니 어쩌면 좋겄습니까. 어르신 속내의 시작이다. 호랭이 물어갈 놈, 흥할 놈, 사람도 아니(?)라는 위험한 수위의 푸념이 섞여지면 속웃음 나기도 하고, 나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 보건진료소에 오시면 허리 다리 아프다, 오만 군데 다 쑤신다는 호소 후 짭짤 허니 약을 잘 지으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이런저런 이야기 보따리가 풀어지는데 수다의 종착은 늘 아들 근심이다. 작년 이맘때, 어디 가서 물어보니, 장가를 아예 못 갈 운은 아니고, 늦게 갈 운이라면서 다행이라 하셨던 정씨. 그 점괘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 일가에도 비슷한 고민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 산책길 버스 정류소에서 다시 만난 정씨. 첫차를 기다리고 계셨다. 두툼한 잠바에 목도리에 장갑까지 엄동 단장이 멀리 행차하는 것을 말해주었다. 장날도 아닌데 어딜 가시느냐고 여쭈었다. 동네 사람들 얘기를 들어봉게로 저짝에 용한 분이 계신다고 해서, 운세 좀 넣어 볼라고요, 하며 웃으신다. 읍내도 아니고 충북 영동이면 백 리는 족히 달려가야 하는 거리.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나누고 보건진료소로 돌아왔다.


  신년 초라서 그럴까. ‘인공지능으로 신축년 관상을 봐 드립니다. 거의 99% 맞는 것 같습니다. 사진 찍고 확인 버튼을 눌러주세요. 기다리면 분석 결과가 나옵니다.’ 어제도 같은 메시지가 왔었다. 관상뿐 아니다. ‘AI가 당신의 신(新) 토정비결을 봐줍니다. 복채는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자도 받았다. 두툼한 잠바, 목도리에 장갑까지 챙겨 입고 굳이 먼 신당을 가지 않더라도 빅데이터로 무장한 인공지능이 관상이나 토정비결을 봐준다는 디지털 점(占)의 시대. 관상가 양반, 내 운세 좀 봐주게나.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수양대군의 대사가 환청으로 들려왔다. 오호라! 어디 한 번 나도 좀 해볼까나.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마스크 쓰고 관상을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나. 마스크 벗는다면 또 어떤 결과가 나올까. 나는 자세를 고쳐 마스크를 착용했다. 한껏 웃으며 찰칵! 사진을 찍었다. 결과가 나타났다. 「이마는 둥근형이라 집안일보다 바깥일을 좋아하겠군요. 대인관계가 좋아 인복이 많습니다. 눈썹은 재물복이 많고 미간이 넓어 자유로운 성격입니다. 눈은 고집이 있어 보이지만 나쁘지 않습니다. 자존심이 세고 턱선에 복이 있습니다. 가끔 변덕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개방적인 성격의 관상입니다.」 별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내 연약한 정곡이 찔린 것 같아 움찔했다. 게다가 마스크 때문에 가려진 입과 코, 볼에 대한 평이 없다. 얼굴을 가리고 찍은 사진인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인가. 참 신통하기도 해라. 이번에는 마스크 벗어볼까.


  이마에 힘을 주고 일부러 찡그린 표정으로 찰칵! 역시 AI는 알고 있다. 이번에는 입과 코, 두 뺨에 대한 소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코는 당돌한 면이 있습니다. 눈이 크지 않고 눈썹이 진해서 재물 복이 좋습니다만, 기가 강합니다. 도톰한 볼이 친화력이 좋고 자존심이 센 편입니다. 이기적인 면도 있지만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관상입니다. 다만, 얼굴에서 나오는 기가 강합니다. 전체적으로 동적이면서도 과묵한 관상입니다.」 힘을 주어 찡그리고 일그러진 표정에서 당돌하고 강한 기운을 읽어 내다니!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아 쓴웃음이 나왔다. 이 정도라면 AI 신뢰도 꽤 높은걸!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 앞에 생년월일시를 드리고, 나의 미래를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쑥스러운 일인가. 믿고 안 믿고를 떠나 호기의 발로로 신 토정비결 AI에게 사주를 넣은 것은 코로나19가 진정될 기운인가, 거세질 운인가, 혹여 세상 흐름에 관한 어떤 평이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미래가 예측 가능한 알파고라면 무슨 답이 있겠지 싶어서 말이다. 복록이 쌓이는 운이라 재물이 들어올 해, 그러나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업무에서 좋은 성과를 올려 예상 밖의 성과금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득이 그저 주어지지 않음을 명심하라. 남쪽으로 가면 힘들고, 동쪽으로 가면 풍파를 당할 것이다. 서와 북의 방향을 살피라. 떨어져 지내는 가족에게 신경 쓰고 건강을 잘 돌보라는 뻔한 권면들. 상세 운(運評)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읽어도 세상을 뒤흔드는 코로나19와 이별 괘(卦)는 없다.


  며칠 후 만난 정씨에게 “잘 다녀오셨어요? 뭐라고 하던가요?”라고 물었다. 관절통이나 요통보다 더 궁금한 그 결과 말이다. “소장님도 참…(웃음).” 눈 한 번 흘기더니 한숨이다. “…우리 아들은 아주 늦게 갈 운이라네요.” 얼굴 사진 두 장, 네 개의 기둥을 넣은 후 쏟아진 호언과 잠언 사이에서 코로나19도 아주 늦게 갈 운인가 생각한다. 새로운 일, 새로운 문제로 꽉 차 있을 앞날일 뿐! 지금 내 앞으로 지나가 버린 바람, 앞으로 불어올 바람을 인공지능이 어찌 아랴마는, 다음 달에 작은 일로 상대를 기쁘게 하는 달이라고 했으니 점심이면 좋겠다. 어르신! 멸치육수 말국에 묵은짐치 볶아 얹어주는, 거시기 그그 국숫집에 가십시다. 안성 장날, 어르신께 프러포즈해야겠다. 설마, 이 일마저 늦게 될 운은 아니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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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진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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