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일기
“그래서, 소장님은 몇 번이나 생각나십니까?” “흠… 네다섯 번? 그 정도… 되는 것 같아요. 많으면 예닐곱 번? 대충 그 정도, 딱히 계산해 본 적 없지만요.” 말끝을 흐렸다. 진료대기실에서 김 씨와 함께 세월호 참사 7주기 기억식 및 4·16 생명안정공원 선포식 생중계를 시청하던 중이었다. 어르신은 급성골수염을 앓던 아들을 하늘로 먼저 보낸 분이다. 아들 이야기를, 나는 4년 전에 돌아가신 시어머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7년 전 그날이 살아났다. 2014년 4월 16일 수요일, 오후 2시 30분. <속보> 여객선 침몰, 180명 구조, 2명 사망, 290여 명 실종. 180명이나 구조했으니, 곧 전부 구했다고 뜨겠네!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으며 생각했다. 이윽고 도착한 소식. 안산 단원고 학생 338명 전원 구조, 경기교육청 대책박,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 단원고 학생 325명 전원 구조. 그럼 그렇지!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라고!
골목을 돌아다니며 출장 중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집마다 대문이 잠겨 있는 것이다. 고사리 꺾으러 가셨나, 못자리 보러 가셨나. 쳐다보기만 해도 짖어대던 백구도 귀찮다는 듯 엎드려 졸고 있다. 어디선가, “소장∼ 어짠 일이셔? 동네 사람들 죄다 꽃귀경 갔어.” 저쪽 정구지밭에서 울린 메아리가 바람에 날아왔다. “아, 꽃구경 가셨군요, 어디로 가셨대요?”
보건진료소로 돌아와 사고 뉴스를 흘려들을 때만 해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TV 앞으로 다가갔다. 흑운(黑雲)이 감돌았고, 슬픈 예감의 적중, 이 섬뜩함.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밤이 지나자 더 많은 뉴스가 쏟아졌다. 4월 17일 오전 8시 17분, 잠수부 555명 증원 구조 투입, 2시간 만의 대참사, 탑승자 475명, 290명 실종, 179명 구조, 6명 사망(속보). 연합신문 발, 그 봄, 숫자 멀미.
4년 후. 전통문화의집 강당에서는 무주세월호추모위원회, 무주시민행동, 무주군공무원노조, 무주군공무직노조, 무주농민회, 전교조무주지회, 민주바로무주시민회, 덕유산친구들과아이들, 무주마을교육공동체 협력으로 416프로젝트 ‘공동의 기억:트라우마’ 영화를 상영하였다. 참사 이후 시간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은 영화였다. 생존학생들이 대학생이 되고 어른이 된 이야기는 ‘어른이 되어’라는 제목으로, 참사의 의미가 무엇인가 되묻는 질문은 ‘이름에게’, 부모의 슬픔은 ‘상실의 궤’로, 그리고 3년 만에 육지로 올라온 녹슨 세월호가 거치된 목포신항의 낮과 밤을 다룬 영화. 상영이 끝나자 관객들의 말문이 막혔던 절통의 시간.
달라져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목소리 높이는 한편, 또 세월호 얘기냐, 지긋지긋하다, 이제 그만 하라! 한다. 얼마나 달라졌고,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 자문해본다. 네가 아는 것을 말해 보라, 누군가 내 어깨를 친다면, 나는 무엇을 아노라, 모르노라 답할 수 있을까. 용기도 없고 자신도 없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540-8번지. 수 많은 연애편지를 올려보낸 주소를 떠올린다. 그는 안산에서, 나는 구천보건진료소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결혼 후 주말부부로 지냈는데, 토요일에도 오후 늦게 퇴근했던 90년대 열일(!) 시절. 소모적인 생활에 한 사람은 직장을 정리하자고 머리를 맞댔다. 내가 안산시로 올라가 고잔동에 살았더라면, 16학번 우리 작은딸은 단원고에 다녔을 것이다. 대학 입시 때문에 서울예술대 면접 보러 갔던 날, 학교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우리가 안산에 살았더라면 네가 다녔을 학교야.” 노랑 리본 깃발이 나부끼던 교정과 암울한 중앙동 상가. 비통에 젖은 도시여서 숨소리조차 크게 내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오냐 실컷 욕하고 원망하고 죽이고 또 죽이려무나, 네가 그럴 수 있으라고 나 여기 있지 않느냐. 상을 당한 이에게 정중한 조문을 하는 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도덕입니다. 그러나 참척을 당한 에미에게 하는 조의는 그게 아무리 조심스럽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위로일지라도 모진 고문이요, 견디기 어려운 수모였습니다. 자식이 내 상을 당해 조문을 받는 게 순리이거늘 그 복도 못 타 역리(逆理)에 굴복해야 되는 비참한 처지.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는 상대방을 볼 때는 그 자리에서 당장 꺼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습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박완서)
보건진료소에서 만난 참척의 어르신들은 실컷 울고 싶은데 울어지지 않아 미치고 환장하겠다는 답답함을 토로하곤 하셨다. 사람이 점점 등신이 되는 것 같고, 무얼 먹든 수시로 토해지고, 내 맴이 내 맴이 아니라고 하셨다. 자식 잡아먹은 죄인이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고 하셨다. 하루에 많으면 예닐곱 번 어머니 생각이 난다는 나의 말끝에 침묵하던 김씨. “…하루에도 팔만 번은 생각날 꺼이네요.” 하신다. 새벽에 눈 뜨고 저녁에 눈 감는 순간까지. 아, 그것은 끊임없이 계속 생각난다는 말씀 아닌가. 나는 숨고만 싶었다.
아들 없는 세상이지만 고마운 이웃들 때문에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고 하셨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더욱 묵직하게 들렸다. 고통은 늘 당한 자의 몫이다. 부끄러움은 왜 국민들의 몫인가. 참사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일곱 번, 아니 여덟 번씩 만 번 기억하는 것, 그것은 이웃으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 손바닥으로 날아들던 저 거짓 뉴스들과 오만함. 나는 더불어 그것까지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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