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일기
“소장님! 기침 멎듯이 욕망이 멈추는 약도 있습니까?” ‘네에? …뭐… 뭐라고요?’ 처음 뵙는 분이 던진 갑작스러운 질문이 얇은 내 고막을 징으로 치는 것 같았다. 마당을 둘러보더니 들어선 김씨.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흙 묻은 그녀의 보라색 고무신도 인상적이었다. 몸이 아프거나 다쳐서 보건진료소를 찾아오는 환자가 대부분이거늘, 뜻밖의 물음에 멘붕! 예 혹은 아니요 대답도 못 하고 서 있기만 했다. 아무튼 나는 진료실 옆 상담실로 안내하였다. 커피 한잔 마주 놓자, “이거 중한 병 맞지요?” 재질문이다. 김씨의 과거와 현재가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김씨의 화단은 봄이 오면 노랑 꽃, 빨강 꽃, 하얀 꽃으로 색 물결이 넘치기 시작한단다. 세월의 더께로 속살이 채워진 꽃잔디부터 패랭이는 논두렁 울타리 대나무 빗살을 비집고 들어올 정도노라, ‘자식’ 자랑이 거창했다. 나는 “어머나! 그렇군요!” 감탄사만 연발하며 맞장구쳤다. 이야기 중간 중간에 휴대폰에 담은 사진을 보여주는 김씨. 손끝으로 펼쳐진 꽃이 확대될 때마다 나는 상상 속 그녀의 정원에 꽃그림을 추가했다. 이야기는 더 이어졌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아끼는 꽃을 뽑아 욕심 없이 나눌 정도로 통 큰 기부를 하면서도, 이웃 화단에 당신에게 없는 어떤 아이(!)를 만나면 욕망의 걸쇠가 풀린다는 것이다. 갖고 싶은 마음이 속불로 타오른다는 것이었다. 김씨의 고민은 특별했다. 구불구불 산길 돌아 덕유 자락에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꾼 지 20년이 넘었다는 그녀. 해발 600m가 넘는 언덕에 둥지를 틀기까지 구절양장의 사연이야 더 적어 무엇하리. 나는 그의 화려한 과거와 증상에 경청과 공감이라는 처방으로 간호했다. 한 시간 반쯤 지났을까. 영화 한 편 보고 난 것 같은 피곤함이 몰려왔다. 다소 용감하게 보건진료소에 들어서던 김씨, 한동안 이야기를 쏟아내시더니 조금은 차분해진 것 같았다. 나는 얼마 전에 겪은 일을 이야기해드렸다.
“안녕하세요?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까요?” 복숭아밭으로 들어서며 인사를 드렸다. 노란 상자 위에 올라서서 꽃을 솎아내는 이씨. 어르신은 고개를 갸웃 기운 채 돌아보더니 “어디 다녀오시는가?” 하신다. 나는 밭 가운데로 더 걸어 들어갔다. 땅바닥에는 적화(摘花)들이 화문석 위를 수놓은 꽃무늬처럼 펼쳐져 있다. 이제 막 나무에서 떨어져 모양조차 일그러짐 없는 복사꽃. 밟기 차마 무안하여 꽃을 피해 폴짝폴짝 흙을 디뎠다. 어르신은 그냥 밟아도 암시랑 않다지만, 아, 그건 너무 무참한 일 아닌가. 한 손에는 가위, 다른 손에는 구멍 난 장갑으로 드러난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을 이용하여 꽃모가지 집어 따는 꽃솎음. 꽃봉오리 시절 적뢰(摘蕾) 지나 봉오리에서 놓친 꽃들을 다시 솎아내는 적화.
“약은 드셨어요?” “그랑께로 이렇게 일을 하지요.” 하신다. 나는 궁금했다. 꽃을 솎아내는 기준이 무엇일까. 어느 꽃은 떨어지고 어느 꽃은 남겨진다. 가지 끝에서 나무 몸통에 이르기까지 몽실몽실한 꽃이 피면 복숭아 향기는 폭포처럼 쏟아진다. 눈 감고 있노라면 마음이 쭐렁이고 꽃 멀미가 날 지경이다. 볼 때마다 찬탄을 부르는 복숭아꽃. 꽃솎음은 더 크고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 꽃을 솎아 꽃수를 제한하는 일이다. 복숭아뿐 아니다. 토마토, 사과도 마찬가지이다. 종일토록 나무 위 혹은 사다리 위에서 고개를 추어올려 꽃과 열매를 일일이 살펴야 하는 일은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고된 작업이다. 보건진료소에서 경추(頸椎)나 어깨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 일이다.
나는 꽃을 좋아한다. 꽃 자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가꾸며 돌보는 시간 안에 있는 내 모습이 좋다. 한잎 두잎 새싹이 돋고 꽃이 피기 시작하면 아침 일찍 일어나 가장 먼저 안부를 나눈다. 얼마나 자랐을까, 얼마나 피었을까, 어느 날은 자다가도 일어나 보고 있으니, 꽃집사 중독 초기 증세가 아닐는지. “자잘한 꽃을 따주나요?” 가지 하나 조심스레 휘어잡으며 도울 요량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이씨는 상자에서 내려오더니 보라는 듯 시범을 보여주셨다. 작은 꽃을 따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가지를 가상(假像)의 선이라 여기고, 하늘 치켜보는 꽃을 따내는 것이란다. 꽃이 좀 작더라도 땅 바라보는 꽃들은 손대지 말라신다. 하늘 향한 꽃에서 열린 열매는 점점 무거워져 꼭지가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란다. 바닥을 향한 꽃에 열린 열매가 손길 따라 무럭무럭 자란다고. 나는 새로 알게 된 사실이었고 심장을 서늘하게 훑어내는 어떤 가르침이었다. 하늘 향해 잘난 척 고개 쳐들어봤자, 말 그대로 손톱 끝에서 깔끔한 참수형이었다.
백 가지가 넘는 꽃을 가꾼다는 김씨. 그러나 당신이 가지지 못한 한 가지 꽃에 대한 욕망 앞에 괴롭다는 그녀. 절제가 어렵다는 호소를 부끄러움 없이 고백하는 그녀. 나는 오히려 드러나지 않은 나의 욕망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꽃을 가꾸는 이유, 더 예쁜 꽃을 보기 위함이다. 욕망에는 어떤 불이 있어 뜨거워지는 것일까. 불에 혀가 있어 타인의 것을 탐하려고 날름거릴 때, 선 넘는 불꽃을 도려내듯 솎아낼 수 있는 도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에게 이미 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히 사용치 않아 마모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웃으며 욕망을 멈추는 약을 달라던 김씨. 그녀는 욕망과 절제 사이에서 소유의 끝에 서 있는 괴물을 닮지 않으려는 자신을 만난 것이 분명했다. 꽃솎음 이야기가 어떤 울림으로 다가갔을까. 다가가기는 했을까. 백합 두 뿌리, 아이리스 한 뭉치. 흔쾌히 삽으로 떠서 나누었다. 오르막 산길 따라 마당 가득 피어 있는 꽃들이 손 흔드는 정원으로 돌아간 김씨. 보건진료소 마당 알리움(백합과:Allium spp.)을 눈여겨보시기로, 꽃 지고 뿌리 늘면 반으로 분가해드리겠노라 약속하였다. 아침에는 꽃자리마다 물 한 번 더 끼얹어주었다. 마치 창조자의 일을 거드는 가드닝 요정이라도 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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