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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Oct 19. 2015

[포토에세이] 외로움을 견디는 나이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외로움을 견디는 나이>


<속보> <여객선 침몰> 4월 16일 오후 2시 30분, 180명 구조, 2명 사망, 290여 명 실종(속보), 헤드라인 뉴스가 손바닥 안으로 날아들었습니다. 말없이 바라보다 왕진 가방을 메고 골목길로 들어섰습니다. 집집이 대문이 잠겨있습니다. 고사리 꺾으러 산에 가셨나, 모내기 준비하느라 논에 가셨나. 초여름 같은 늦봄, 양 씨 할머니네 백구도 늘어졌습니다. 보기만 하면 으르렁 짖어대는데 오늘은 만사 귀찮다는 듯 엎드려있습니다. 할머니가 전화로 부탁하신 관절통약 봉투를 마루에 놓았습니다. 바람에 날아갈세라 작은 돌멩이로 눌러놓고는 마당을 나왔습니다.


골목길을 막 돌아서던 참이었습니다. 길 건너 정구지 밭에서 일하고 계시는군요. 현석이네 할머니가 보입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시원한 물 한 잔을 얻어 마시고는, 마을 어르신들 모두 통영으로 봄나들이 꽃구경 가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왜 안 가셨어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씀을 시작합니다. 마음 깊은 속에 담아둔 오래된 이야기.


서울에서 살던 현석이가 할머니 집으로 오게 된 것은 부모님의 이혼 탓입니다. 오갈 데가 없어지자 결국 할머니에게 맡겨지게 된 것입니다. 유치원에 다니던 현석이가 이제는 열일곱 살이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큰 고민은 현석이의 ‘도벽’입니다. 손자가 어렸을 때는 어리니까. 철이 없으니까, 엄마랑 헤어져 지내는 딱한 아이니까. 알아도 모른 척, 못 본 척, 타일러 보기도 하고, 때로는 따끔한 훈계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현석의 그것은 생각처럼 쉽게 고쳐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담대해져 갔습니다.


강 씨 할머니가 참깨를 팔았습니다. 오만 원권 지폐를 책갈피 사이에 한 장 한 장 끼워서 침대 아래에 숨겨 두었는데, 고사리 꺾으러 산에 다녀온 사이에 감쪽같이 없어졌습니다. 추석에는 김 씨네 딸이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하여 샀다는 디지털카메라, 그것이 사라졌습니다. 이 씨는 애써 농사지은 고추 300근을 팔았습니다. 안방에 감췄습니다. 저녁 무렵 돈이 사라졌습니다. 현석이의 손에 의한 것이라고 주민들은 심증에 거할 뿐, 물증을 잡지 못 하니 증거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귀신 곡할 노릇이라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이대로 둘 수 없다며 급기야 회관에 비상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그동안 피해를 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경찰에 정식으로 신고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야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현석이만 아웃(!)시키면 마을에는 이전의 평화가 올 것이라고 의견을 모은 것입니다. 이웃과 언쟁이 잦아지면서 할머니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져 갔습니다. 현석이 아버지에게 연락하여 보상도 해주고, 당신이 몸소 품을 팔아 갚기도 하였지만, 한계에 이른 것입니다. 할머니는 도무지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으니 저승에서 같이 만나 살자고, 현석이를 앞에 앉혀놓고 농약을 컵에 부었습니다. "너부터 마셔라. 어서! 이놈아! 나는 너 죽은 거 보고 마실란다." 현석이도 울고, 할머니도 울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저도 웁니다.


"소장님! 제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가요? 끝이 안 보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싸움을 멈출 수 있을까요? 이러니 내가 무슨 낯짝으로 여행을 따라가겠소?" 반복되는 현석이의 이상 행동은 공격적 충동의 발현이거나 어린 시절 자신이 잃어버린 가족을 돌려달라는 마음속 울부짖음이 아니었을까. 현석이를 지켜야 할 가족과 이웃의 따뜻함은 점점 힘을 잃었고, 세상을 향한 빚을 늘려가는 현석이. 제대로 된 사회적 울타리를 만들어주지 못한 우리는 또 다른 채무자가 아닐까요. 보건진료소에 도착하니 TV에서 여전히 못 다 핀 열일곱 청춘들이 무심하게 가라앉는 소식이 현지로부터 생중계됩니다. 눈 앞에서 펼쳐지는, 믿을 수 없는 영화같은 장면들이라니. 날 선 검처럼 낭자하고 섬뜩하여라. 아이고야.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어른이라는 사실이 무참하도록 죄스러워라.


하늘이 갑자기 흐려집니다. 비가 오려나 봅니다. 개구리 소리는 더욱 요란해집니다. 4월 17일 오전 08시 17분, 잠수부 555명 증원 구조 투입, 2시간 만의 대참사, 탑승자 475명, 290명 실종, 179명 구조, 6명 사망(속보). 4월 17일 오전 08시 17분, 잠수부 555명 증원 구조 투입, 2시간 만의 대참사, 탑승자 475명, 290명 실종, 179명 구조, 6명 사망(속보). 2014년, 연합신문 발.


그,

...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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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괴목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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