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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Oct 19. 2015

[포토에세이] 넘어지지 않고서야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넘어지지 않고서야>



남편도 딸도 말이 없다. 뭐라고 한 마디 해야 하기는 할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망설이다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대입 수시 전형 면접 시험을 치르는 딸을 위하여 하루 전에 경기도 안산시에 도착하였다. 학교를 둘러보고 근처에 숙박 장소를 정하였다. 다음 날 시험을 마치고 나온 딸을 차에 태우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모처럼 안산까지 왔으니 바닷가에 가볼까?


딸에게 수고했다는 말 외에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남편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보려는 듯 먹을 것을 나열한다. 횟고기 먹을까? 초밥은? 그럼 돼지 갈비 먹을까? 뒷좌석에 앉은 딸은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눈을 감는다.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짧은 대답뿐. 바다와 횟고기를 떠올리며 가을 낭만을 꿈꾸다니, 딸아, 어른들은 때로 이렇게 이기적이다.


해물찜으로 그간의 수고를 위로하였다. 다시 한 주가 지나갔다. 이번에는 서울에 있는 모 대학 수시전형 1차에 합격하여 2차 실기시험을 보러 가야 했다. 지방에서 서울까지 오르내리는 일이 만만찮은데다가 주말 선약이 겹쳐 서울에 사는 동생에게 부탁하였다. 딸은 아침 8시부터 시작되는 시험에 맞추기 위하여 6시쯤에 집을 나섰을 것이다.


지하철 통근으로 한두 시간 이동하는 것쯤이야 서울 사람들에게는 보통의 일이라고 동생은 말했다. 지하철에서 책 보고, 지하철에서  리포트하고, 지하철에서 잠을 자고. 지하철이 소소한 일상과 업무를 처리하는 공간이 된 지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오게 되면 조카도 곧 그런 생활에 적응할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딸에게 대전행 KTX 승차권을 예매하여 전송하였다.


나는 야생화 사진전시회 개막식이 열리는 군산시 예술의 전당으로 이동하면서 문자를 보냈다. 딸!끝났겠네수고많았어무슨문제가출제되었는지궁금하다/아빠가발명품만들어서S차원으로간다고아들딸들한테통보하고화장실문을닫았는데문이번쩍거리다첫장면끝나/마지막장면에서는바다에서아들과딸아버지가만나게돼/첫장면과마지막장면사이의시나리오를완성하시오가문제였어/뭐라고썼는지기억도안나고피곤해/글로쓰기도말로하기도어렵네엄마이따봐.


딸은 영화영상 관련 학과 지원하여 시험을 치르고 있다. S대학의 영화과 정원은 30명이다. 수시 전형에서 실기시험으로 17명을 선발하고, 특기생 2명을 선발한다. 수능 나군에 속해 있는 대학으로 정시에서는 11명을 선발한다. 수시 1차 전형에서 정원의 10 배수를 선발하고, 2차에서는 3 배수를 선발한다. 최종 면접과 실기에서 11명을 선발한다.


H대학 연극영화학과의 경우에는 모집 인원 49명이다. 학생부 성적으로 5명, 학생부 종합으로 13명, 논술 성적 7명, 특기생 14명을 선발하고, 수능 가군에 속해 있는 대학으로 정시에서는 10명을 선발한다. 그 외의 대학은 각설하겠다. 밖은 어두운데 요란한 천둥소리, 시원한 빗줄기. 도심 속 시월의 주말 가을 아침을 안산시에서 맞이하였다.


창문가에 날아와 지저귀는 새들의 합창으로 하루를 여는 산촌의 아침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두발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서 울고 서 있던 모습이 어제 같아. 대학을 가다니. 내 어찌 이 대학 땅을 밟아 보것는가. 딸 덕분이네. 딸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은 싱글벙글이다. 남편은 안산에서, 나는 무주에서 결혼하고도 꽤 오랫동안 주말부부로 지냈다.


오래간만에 안산으로 달려오는 길, 무슨 힘으로 남편과 나는 이토록 먼 길을 오가며 사랑을 이었던가. 새삼 미소가 지어졌다. 보건진료소를 그만 두고 안산으로 올라와 남편과 함께 안산에서 살고 있다면 대학 시험을 보러 다니는 딸이 어쩌면 작년에 세월호를 탔을지도 모르겠구나. 가슴이 아리면서 소름이 돋았어. 중앙역 앞에 있던 하얀장 주변은 상전벽해가 되었구나.


잠든 남편을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질 않는다. 화가 난 나는 딸과 함께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는데  택시마다 우리를 외면하고 쌩쌩 지나가버린다. 주차장으로 달려가 남편의 차를 끌고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방향과 정반대로 자동차가 질주한다. 결국 면접 시험 시간에 늦어버린, 애타게 발을 동동 구르다 눈을 떠보니 꿈이다. 딸아! 너는 무슨 꿈을 꾸었느냐.


꿈의 좌표에 선을 긋는 기로에 서 있는 너야. 널 낳은 어미라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이 작은 염원뿐이라니. 움직이는 사람만이 넘어질 수 있고, 넘어진 사람만이 일어설 수 있다. 넘어지지 않고서야 어찌 일어설 수 있으랴.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일어설 수 있을까. 오르막 내리막 내리막 오르막 길에서 길로 전진하라, 너의 길을 꿋꿋이 걷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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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북창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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