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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Oct 05. 2015

[포토에세이] 못 가본 길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못 가본 길>



출입문이 닫힌다.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어디쯤인가 하여 읽던 책을 덮고는 무심결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편과 아이들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서 있다. 나에게 손짓을 하며 무어라 소리치는데 전혀 들리지 않는다. 이내 그들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KTX에 오른 우리는 객차와 객차 사이에 있는 보조의자에 앉아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기차 구경하겠다며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가방에서 읽다만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집을 꺼내어 읽기 시작하였다. 대전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을 들은 남편과 아이들은 중간 객실에서 곧바로 내린 것이었다. 객차 사이에서 책을 보고 있던 나는 방송을 듣지 못하였다. 멀어져가는 일행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이없게도 동대구역까지 실려가야만 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후배 간호사가 보건진료소에 왔다. 세 번째 만남이다. 그녀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이십 년 이상 보건진료소에 근무하고 있는 간호사들을 만나고 있다. 보건진료소장의 장기근속 동기 및 지속성 요인을 분석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 중이다. 오랫동안, 그것도 근무 환경과 생활 여건이 열악한 농어촌에서 근무하게 된 동기와 지속성 요인이 무엇인지, 생애사적 질적(質的)연구가 그녀의 학위 논문 디자인이다.


직업 선택 동기와 지속성이 어떻게 개인의 생애로 이어졌는지, 사회와 어떠한 상호성으로 연결되었는지, 그 요인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문항들이 쏟아졌다. 출생부터 성장 배경, 간호학과의 지원 동기, 보건진료소장의 선발, 훈련, 배치와 활동 등을 통하여 발견된 공통적 지속적 속성과 그들만이 가진 특수성은 무엇인지를 분석할 예정이다.


그녀의 연구계획서를 이메일로 받았을 때, 나는 개인의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구술적 자료는 매우 주관적일 것인데 개인의 생애를 제도와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과 맞물린 해석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삶의 이면에 펼쳐진 사회 배경 구조를 바라본다는 연구 방식이 매우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어쩌면 사회과학 연구에서 다루기 힘든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오히려 더 부각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것이 큰 장점이기도 할 것이다. 체험의 사실성을 바탕으로 사회적 삶까지 살펴보겠다는 방식이 이채로워 그녀의 연구 결과에 작지 않은 기대를 걸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어색함은 간호사라는 동질감으로 금세 극복되었다.


면담이 시작되면 서너 시간씩 이어졌다. 이십여 년 전의 기억을 회상할 수 있었다. 기억마저 희미해진 옛일들이 창밖 풍경처럼 새삼스럽고 소중하게 다가왔다. 마지막 질문이 이어졌다. 다시 태어난다면 이 직업을 다시 선택하겠는가. 나는 다시 보건진료소장으로 일하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연구자는 의외의 대답이라는 듯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같은 일을 또 할 것인가를 거부한 것은 못 가본 길에 대한 미련 아닐까. 한 나라의 정치, 경제적 상황이, 법과 제도가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반영되었음은 분명할 것이다. 보건진료소장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이 동기 이론에서 확장된 요인들을 발견하기에 그리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분명 단서는 제공해 줄 것이라 믿는다. 조직에 소속되어 위로는 상사와 선배를,


아래로는 후배들과 팀을 이루어 목표를 향해 선전하며 때로는 부대끼며 정쟁하는 직장, 혼자가 아닌 곳에서 일해보고 싶다. 당신에게 보건진료소장으로서 삶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나의 삶, 그 자체였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녀를 태운 서울행 버스가 떠난 후 다시 보건진료소로 돌아오는 길. 잠시 후 대전에 도착할 것이라는 방송을 듣지 못한 채 동대구역까지 달렸던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차창 밖으로 낯선 바깥 풍경을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보다 되돌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낯선 곳에서 잠시 불안한 자유를 누리다가 돌아오는 길이 그래도 낯설지 않음은 어쩌면 익숙한 곳으로 떠나는 여행 같은, 아직은 갈 길이 머언, 갈 수 없는 못 가본 길이 남아 있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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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북창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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