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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Oct 05. 2015

[포토에세이] 더 소중한 그 무엇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더 소중한 그 무엇>


소장! 거기, 거기 좀 잘 보시구려. 까장까장한 것이. 가려운 것 같기도 하고, 시답찮게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영 기분이 안 좋구먼. 집에 있는 연고를 발라봤는데 소용이 없어. 모기가 물었을 리도 없는디. 왜 긍가? 월요일 아침, 여덟 시를 조금 넘겼을까. 윗동네 박 씨 할머니가 진료실로 들어오셨다. 속옷을 내린 후 몸통을 살펴보니 오른쪽 등과 엉덩이 부위를 중심으로 작은 물집과 발진(papule)이 도돌하다.


어딘가 몹시 아프지 않으세요? 많이 불편하실 것 같은데요. 대상포진을 염두에 둔 질문이다. 으슬으슬 추운 것 같기도 하고, 영 기분이 안 좋아. 앞으로 돌아보실래요? 나는 진찰 침대 커튼을 닫고 나와 책상에 앉았다. 읍내 내과 병원으로 어르신을 보내드리기 위하여 의뢰서를 작성하였다. 할머니는 뒤따라 나오시더니 이내 소파에 누우신다. 보건진료소에서는 스무 명, 많게는 서른 명이 넘는 환자를 만난다.


특히 월요일에는 연휴 끝에 업무를 시작하니 더욱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간다. 온종일 일에 치이다 퇴근 무렵이면 나도 지쳐 쓰러질 지경이다. 아픈 몸과 마음을 가지고 보건진료소에 드나드는 주민들을 대하는 내 모습이 마치 혼잡한 사거리에서 호루라기를 불어가며 좌회전하라 우회전하라 바쁜 수신호를 보내는 교통경찰관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기운이 떨어지고, 쌓인 피로에 때로 짜증도 나.


때로 어떤 일들은 예상치 않은 곳에서 생긴다. 목요일이 되었다. 지난 월요일 아침에 오셨던 윗동네 박 씨 할머니가 다시 보건진료소에 오셨다. 부탁드렸던 대로 병원에는 잘 다녀오셨는지 궁금하여 어제는 수차례 전화를 드렸지만, 통화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귀가 어두워 벨 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려니 생각되어 오후에 가정방문을 다녀올 참이었던 차.


반갑기도 하고 아픈 부위는 어찌 되었을까 염려되어 다시 속옷을 내린 후 몸통을 살펴보니, 병원에서 치료받은 거즈와 반창고가 덮여있다. 드레싱을 걷어내고 병변(病變)을 살피는데 사흘 전에 보았던 좁쌀 크기 구진이 엄지손톱만큼 불어나 있다. 몰캉한 물풍선처럼 수포가 자라 있는데. 병원에는 다녀오셨군요. 어제서야 다녀왔네. 의뢰서를 써 드린 것이 월요일이었는데 어제서야?


사람 사는 게 뭔지 말이야, 고추도 따야 하고, 참깨도 털어야겠고, 그날 소장님 말을 들으니 꽤 치료가 어려운게비다 생각했네. 며칠 걸리겠다 싶어서 말이지. 집에 쌓인 일 좀 대충 정리하고 병원에 가려하였더니 며칠 미뤄졌지 뭐야. 그렇게 됐네. 박 씨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기운도 없다. 도무지 아파서 참을 수가 없어 소염제 주사라도 맞으려고 왔네. 여기 계신 분들, 다들 바쁘겠지만, 저부터 주사 좀 맞아야겠습니다.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대답도 하기 전에 바지부터 내리신다.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눅 14:16-20)


뜬금없이 떠오르는 누가복음 말씀이라니.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고 계신 할머니의 모습이 안쓰럽다. 주사를 맞고 나서는 다시 읍내 병원에 가야겠다고 소파에 누워 버스를 기다리신다. 의뢰서를 작성하고, 빨리 병원에 가셔야 한다고, 정말 꼭 가셔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고추도 따야 하고, 참깨도 털어야 하고, 물건도 정리해야 하고. 우리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답도 없는 거창한 철학적 고뇌에 빠진 아침이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나라고 어찌 예외일까. 진정 소중한 것을 뒤로 제쳐 두고, 어쩌면 덜 소중한 그 무엇을 위하여 동(東)으로 서(西)로 분주한 것은 아닐까. 우리가 진정 애쓰고 힘쓰는 것은 무엇을 위함일까. 어리석은 핑계로 소중한 것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을 아닐까. 아니면 이마저도 모든 것이 진정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옳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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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괴목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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