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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Oct 31. 2015

[포토에세이] 어머니의 속마음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어머니의 속마음>



가시게요, 빨리 나오세요! 소장님 혼자 다녀오세요!  이슬젖은 붉은 알밤줍는 즐거움을 아시는가. 마치 풀섶에서 보물 찾기 하는 기분이다. 엄지손톱보다 토실한 알밤이 발간 얼굴을 내밀며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반긴다. 꼬장한 나무 막대기로 껍집을 벗겨내고, 입으로 속껍질을 벗겨내면 단단한 속살이 우두득우두둑. 신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한 귀한 것을 취한 것 같아 저저절로 감사와 감격이 묻어날 정도이지. 고슴도치 밤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우거진 억센 풀줄기에 벌건 핏줄이 상처로 남아도 알밤줍는 즐거움에 비할까.


며칠 전부터 새벽 소풍을 함께 가기로 약속한 이 씨의 태도가 심드렁하다. 재작년과 작년, 거친 산속을 오가며 애써 주운 알밤을 갖다 주시기로 죄송한 마음에 올해는 따라나서기로 했던 것이다. 목소리에 며칠전만해도 넘쳐나던 활달함이 없다. 좀 이상하다. 양말을 벗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보건진료소에 오신 이 씨의 표정이 사뭇 다르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무척 어둡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평소의 이 씨라면 보건진료소 현관 입구에 도착하기 전부터 멀리서도 들릴 정도로 힘찬 발걸음 소리,


소장님 계신가하며 문을 열 때 쾌활한 목소리, 생기돋는 빨강 립스틱, 류머티스성 관절염으로 손가락 마디마디는 구부러지고 휘어졌어도 어제는 분홍색, 오늘은 보라색 매니큐어를 바르며 분위기를 바꾸곤 하던 분이 아니신가 말이지. 아침에 세수를 안 하셨나, 머리도 안 감았나? 산뜻한 티셔츠까지 주름잡아 있던 분이 아니시던가. 이른 봄 아기상추며, 호박, 가을 고수, 겨울엔 고구마까지 크고 작은 푸성귀를 나눠주시며 친절하고 사랑 많은 이 씨.


진료대기실 소파에 앉은 이 씨는 신경정신과에 다녀오셨다며 호주머니에서 약봉투를 꺼내놓는다. 무슨 검사를 받았는지 모르겠으나 열세 가지 검사 중에서 열 가지가 이상이 있다고 하네요. 그것은 아주 심각하다는 뜻이라고 의사양반이 그러더만요.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나도 모르것당게요. 세상에 재미난 일이 한 개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한 개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고, 요즘은 사는 맛이 없습니다.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목소리는 힘을 잃었고, 당당하던 어깨마저 늘어졌다.


이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첫 아이를 낳고 겪었던 산후우울증을 떠올렸다. 갓난아이가 요람에서 우는데, 저 아이는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갈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면서 요람 속 아기가 너무나 측은하게 생각되어졌다. 안아줘도 안쓰럽고, 젖을 먹여도 안쓰럽고, 회진시간이면 담당 의사 앞에서 까닭 모를 눈물을 쏟아내던 기억. 세상에 재미난 일이 한 개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다는 이 씨의 이야기가 충분히 공감되어 두 손을 맞잡아드렸다.     


창문을 열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방 안에 떠다니던 크고 작은 먼지들이 밖으로 나가고, 새 공기는 안으로 들어온다. 요즘 같은 환절기에 창문을 열어놓고 잠이 든다면 십중팔구 감기에 걸릴 것이다. 마음의 감기라고도 일컬어지는 우울증. 삶의 전환점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먼지들이 찬바람이 되어 마음으로 들어온 것은 아닐까. 추석 명절에 자녀들이 바쁘다고 전화 한 통뿐, 이 씨의 집에 다녀가지 않았단다. 바쁘면 오지 말라 하였더니 정말 오지 않는 철부지 것들이란다.     


어미가 그런다고 정말로 안 오면 되겠느냐며 자식들에게 다 보여주지 못한 속마음을 털어놓으신다. 이 씨를 보며 감정에 쌓인 먼지를 마음속에 꾹꾹 담아두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는 생각을 한다. 아프면 아프다고,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좋은 것은 좋다고,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할 일이다. 고마운 것은 고맙다고, 미안한 것은 미안하다고 말하며 마음 속 먼지를 털어내는 것, 그것은 쉽고도 정녕 어려운 일일까. 어머니, 우리 밤 주우러 언제 갈까요? 이슬이 기다려요. 찬 바람이 우리를 부르네요. 창문을 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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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남면 굴암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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