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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Oct 31. 2015

[포토에세이] 그녀만의 용서법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그녀만의 용서법>



소장님, 소화제 좀 주세요! 혼자만 드시지 말고 저도 좀 나눠주세요. 진료실에서 약장으로 향하며 장난기 섞인 나의 말에 권 씨가 웃는다. 그녀와 나는 이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날마다 소화제를 먹어야 하고 숯불에 달인 막걸리를 마시는 권 씨. 그녀가 왜 소화제나 막걸리를 의지하는지 이유를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의 남편에게는 다른 사람의 크고 작은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병’이 있다.  호형호제하며 하루가 멀다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눈 이웃이 있었다. 형제보다 가까이 지내던 남편은 그 집의 대출 보증을 섰다. 권 씨와 남편은 옆집을 대신하여 빚을 갚아야 했고, 급기야 논밭까지 날아갔다. 설상가상으로 마을에는 이상한 소문까지 퍼졌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배신, 서로를 향한 날 선 욕설과 싸움으로 형제 사이는 원수가 되었다. 날이 밝으면 논밭에서 만나니 날마다 그야말로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원수였다. 속상한 일을 겪으면 화가 나고 분노하는 것은 정상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 오래 지속될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근심은 커지고 우울증으로 발전한다.


권 씨는 읍내와 인근 도시의 신경정신과를 다니며 상담을 받고 약을 먹었다. 권 씨의 화풀이는  연습되었고, 익숙해져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꺼지지 않는 불씨가 도사리고 있었다. 잊힌 듯 지내다가도 불현듯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가슴이 조여왔고, 목울대에는 올라오지도 내려가지도 않는 단단한 무엇인가가 매달려 바윗줄을 당기는  듯하였다.


막걸리를 솥에 붓는다. 아궁이에서 벌겋게 달아오는 참나무 장작불을 막걸리가 끓고 있는 가마솥에 집어넣는다. 솥에서 하얀 거품과 안개가 일순 화산처럼 솟구친다. 부글부글 거품을 일으키던 막걸리가 이내 잠잠해진다. 체에 거른 막걸리를 시원하게 식혔다가 잠자리에 들기 전 한 잔씩 마시기 시작하였다. 나는 권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한다.


그녀는 가마솥 안에 벌겋게 달아오른 참나무 숯불을 집어넣으며 불처럼 타오르는 당신의 분노도 함께 집어넣었을 것이다. 화산처럼 솟아오르는 거품을 저으며 당신의 아픔까지 저었을 것이다.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을 그렇게 방어하며 막걸리를 마셨을 것이다. 권 씨는 얼마나 많은 담금질을 하였을까. 아픈 사연을 알게 된 후 나는 시간만 허락하면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소화제 몇 알만 받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바쁘게 보건진료소를 나가는 권 씨.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을린 피부에서는 건강함이 느껴졌고, 상추 한 포기, 사과 몇 개라도 나눠주려는 마음에서는 자상함을 느꼈던 그때에는 이런 아픔을 품고 지내는 사람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었다. 읍내 장에 나갈 때면 이웃의 두부나 콩나물, 심지어 농자재 심부름까지 도맡아 여전히 바쁜 권 씨의 남편을 떠올린다.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움받을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상대의 부탁을 받아들이기 불편한데 거절할 용기가 없다면 미움받을 용기를 내라고 쉽게 말한다. 숯불에 달군 막걸리를 병에 담을 때마다 권 씨는 마음까지 꾹꾹 눌러 담았을 것이다. 혼자만 먹지 말고 나눠달라는 나의 말에 그녀가 웃을 수 있는 것은 이제 그녀는 우월한 승자의 자리를 점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가마솥 막걸리에 벌겋게 달아오른 숯불을 넣으며 화(火)를 달랜 권 씨를 생각하며 독(毒)으로 독(毒)을 제거하고, 선(善)으로 악(惡)을 이겨 넘긴 어르신들의 지혜를 읽는다. 물이 닿는 순간 불이 힘을 잃듯, 분노의 불씨가 용서의 막걸리로 힘을 잃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미움의 가시가 아니라 화해의 새 살이 돋아 멈추지 말고. 날마다 자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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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읍 읍내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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