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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Nov 07. 2015

[포토에세이] 선유량산구래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선유량산구래>



식사 중이었다. 남편이 포도주가 담긴 유리잔을 건네준다. 이것이 뭐요? 당신 더 건강하라고 주는 것이니 드시오! 아침부터 웬 와인인가 싶어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휴대폰을 가져와서는 지인으로부터 받았다는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서울의 모 종합병원 암센터의 유명한 교수가 보내준 글인데 이 글을 당신의 지인들과 널리 공유하라는 지시로 시작되고 있었다. ‘양파 와인’에 관한 것이었다. 나도 오래전에 받아 읽은 기억이 있다. 남편에게는 이제서야 도착한 모양이다.


스마트폰 메신져를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 건강정보를 받아 보았을 것이다. 며칠 전에 남편이 양파를 썰고, 분리수거함에 포도주 빈 병이 있더라니. 유리잔에 담아 그이가 건네준 것은 와인이었다. 4등분 한 양파를 잘박하게 포도주에 담근 후 2-3일 정도 상온에서 숙성, 양파를 건져내고 포도주를 냉장고에 보관하라고 했다. 하루에 소주잔으로 2~3컵 정도 마시면 당뇨병 환자는 혈당이 떨어지고, 고혈압 환자는 혈압이 정상이 되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갱년기 증상이 호전되며,


수족냉증이 사라지고, 무릎 통증이 해소된다는 내용에 관절염이 완치되고, 체중 감량의 다이어트 효과, 성 기능 회복 및 증강까지, 그야말로 만병을 통치할 정보가 가득하였다. 남편이 보여준 글을 읽으며 포도주는 포도주 자체로, 양파는 양파 자체로 건강에 좋다던데. 그대로 먹으면 될 것을 굳이 와인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나는 의문을 제기하며 근거가 무엇이요, 출처는 어디냐고 따져 물었다. 당신은 귀가 얇아도 너무 얇은 것이 탈이라는 핀잔까지 주면서 이 정보는 신뢰하기 어렵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양파 와인이 위에 열거한 고질적 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면야! 나는 메시지를 읽은 후 소나기 잔소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듣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하다. 오히려 믿지 않는 당신이 문제라며 웃는다. 나도 어이없이 웃고 말았다. 아침 식탁 헤프닝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보건진료소 업무가 시작되었다. 윗마을에 사는 이 씨 아주머니가 밤새 지독한 열감기로 고생했다며 오셨다. 체온을 재니 38도가 넘고, 편도선이 부어있고, 주변에는 치즈 백태가 가득하다.


약을 짓는 사이 아주머니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소장님! 어쩌면 좋을까요? 우리 동네 작은년 할매 둘째 딸 있잖아요? 글쎄, 그 딸이 그저께 죽었다네요. 아직 쉰 살도 안됐는데 불쌍하게 됐구먼요. 어미의 정성을 봐서라도 아픈 몸 털고 일어났어야 하는디. 할매한테는 식구들이 비밀로 하기로 했다네요. 사실대로 말했다간 어머니까지 죽는다고요. 그날 오후, 작은년 할매는 여전한 모습으로 보건진료소 앞 정자에 나오셨다. 택배 기사를 기다리기 위함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오늘은 또 무엇을 부친대요? 별거 아닙니다. 산에 다녀오셨어요? 어제 장날이라 장에서 볶아온 돼지감자랑 망개열매 좀 땄구먼요. 망개열매요? 그것도 약으로 쓰는 거에요? 신선이 하늘에 냉겨놓은 양식이라 하여 선유량이라고 안하던가베요, 죽게 된 사람이 산에서 살아서 돌아왔다 하여 산구래라고도 하지요. 아, 그거! 어린 시절 우리들은 그것을 망개라고 불렀는데. 맞아요. 망개. 잎사귀로 송편을 싸서 쪄먹기도 했지.


서당골 밭에 가면 밭가에 흔하게 있었는데. 큰 병을 고치는 열매라 명과라고도 하지요. 명과명과명과. 그것을 망개라고 변했는갑다. 긍게요. 가실에는 빨강 구슬 같은 것이 지나는 이의 눈길을 붙잡는 열매 아니던가베요. 산약초에 관한 것이라면 거의 전문가 수준이 되신 팔순의 어머니. 어머니는 췌장암에 걸린 작은 딸을 위하여 들로 산으로 약초 순례를 오늘도 멈추지 않는다. 하늘도 무심하셔라. 저 정성이라면, 단단한 바위도 생기를 얻고 일어날 것이야.


어머니라는 이름만으로만 가능한 그 무엇. 닳아도 닳지도 닳아지지도 않아. 아니, 오히려 무한히 채우기만 하는 사랑. 저녁 식탁에 앉은 남편이 다시 와인잔을 건넨다. 당신 건강하라고 주는 것이라는 말이 생각나서 나는 아침의 잔소리를 멈추고 단숨에 들이켰다. 성분과 효과를 따지기 전에 건강을 생각해주는 남편의 사랑이라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혈당과 혈압이 떨어지고, 체중이 감량되고, 게다가 젊은 날의 새 기운이 솟아난다면 그것은 양파와 와인의 효과가 아니라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 덕분인 것을 기억하겠오.


작은년 할매요,

그 사랑을 멈추지 마시오.

아니,

어찌 멈출까.

하늘에 있는 딸의 수명을 이으소서.

당신은

백수를 누리소서.

.

.

.

@적상면 포내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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