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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Nov 17. 2015

[포토에세이] 새로 산 헌 차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새로 산 헌 차>



여보! 좀 나와 봐! 어딘데? 마당! 집에 도착했으면서 마당에서 전화? 투덜대며 나가 보니 검은색 자동차 한 대가 있다. 운전석 유리창을 내리며 남편이 환하게 웃는다. 아직 상황이 파악되지 못한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서 있다. 낯선 그가 남편과 함께 우리 집 마당까지 들어오게 되다니. 긴 과정의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자. 자동차는 달리는 것이 목적이다. 신분과 직급의 상징이기도 하고, 사회 경제적 지위의 상징이기도 하고, 애호가에게는 취미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신분도 직급도 사회 경제적 지위의 과시도 취미도 아닌, 열두  번째 중고자동차일 뿐이다. 그렇게 또 한 대가 우리에게 왔다.


보건진료소에 발령받았을 때 주말이면 버스에 올라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산골을 벗어나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한겨울 폭설이 내리고 버스가 끊기면 주말을 보건진료소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곳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자동차 회사에 입사한 남편이 직원용 60개월 무이자 할부 판매 조건이 나왔다며 자동차를 구입하자고 하였다. 아시아자동차에서 출시된 2,180cc, 검정 디젤 ‘록스타’가 내 인생의 첫 자동차이다.


차를 가지게 되었다는 감당하기 어려운 기쁨도 잠시 임시번호판을 달고 있던 록스타는 마당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온 종일 잠만 잤다. 우리 두 사람에게는 운전면허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말이면 이웃 장수군에 있는 운전학원에 다니며 운전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남편보다 먼저 면허 시험에 합격한 내가 ‘새 차’를 운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좋은 연비, 탁월한 경사각, 독특한 디자인, 투박하고 푸다닥푸다닥 소음이 심한 것마저 매력으로 느껴지던 록스타. 겉모습은 무법자처럼 생겼으나 사륜구동이어서 눈이 오거나 험한 길을 달릴 때마다 특유의 거친 진가를 발휘하였다. 마을 구석구석을 누비며 출장을 다녔고, 구천동과 서울을 오르내렸다. 우리에게 더 없는 든든한 동반자가 되었다. 그런 JEEP의 클래식한 록스타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니, 겨울 혹한에 약한 것이 그것이다. 경유 차량 특유의 약점으로 꼽히는 그것은 추운 날 시동이 걸리지 않거나 주행 중 엔진이 멈춰 서는 등 무주에서 겨울을 나기란 록스타에게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두 번째 자동차는 마쯔다 엔진을 얹었다는 1,139cc, 빨간색 '프라이드 POP'이었다. 출산을 코앞에 두고 있었기에 남산만 한 배가 핸들에 닿을  듯했다. 딸이 태어났다. 뒷좌석에 소쿠리를 안전벨트와 끈으로 묶고, 그 안에 푹신한 이불을 깔아 시트를 만들었다. 어린 딸을 태우고 마을 출장을 다녔고 서울과 무주를 오르내렸다. 열 번도 넘는 자동차를 어렵지 않게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직업이 자동차 영업사원인 까닭이다. 새 차를 구매하려는 고객 중 관리를 제법 잘해온 고객이 나타나거나 급히 차량을 처분해야 할 경우가 생기면 ‘당신 차 바꾼다. 서류 좀 빨리 챙겨놓아’라는 식의 통보가 날아왔다. 덕분에 짧게는 1년, 길게는 수 년씩 여러 차종을 타볼 수 있었던 숱한 중고 자동차 역사의 이면이다.


열쇠를 꽂고 스위치를 돌리면 내비게이션, 카오디오, 블랙박스 등 전자장비에 불이 켜지고, 손가락 끝으로 터치만 하면 주인과 함께 움직이고 달리는 첨단 기술의 집합체, 자동차. 기술의 신진보가 보여주는 놀라움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주인님! 어디로 모실까요? 라며 마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알라딘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엘란트라를 운전하며 출근하던 길에 졸음운전을 하던 상대에게 당했던 접촉 사고, 프라이드 베타를 운전하다 눈길에서 미끄러져 논두렁에 빠진 일, 세피아와 함께 떠났던 여름휴가, 조용하면서도 묵직한 승차감의 소나타와 크레도스. 중형차를 타다가 또다시 소형 프라이드 중고차로 돌아갔을 때의 조악(錯愕)한 상실감.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굴러가는 자동차면 되었다는 마음이다. 가고 싶은 곳으로 달릴 수 있는 자유를 가졌으니 이 무슨 호사란 말인가.


‘헌차이지만 새로 사 왔으니 새 차!’라고 우기는 남편에게 ‘나는 언제쯤 진정 새 차를 타 볼 수 있을까?’라고 말하는 중,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말이 귓가에 울려온다. 사람이 말을 타면 종을 두고 싶어 하는 법이지. 네가 그 짝이구나. 기마(騎馬)하면 욕솔로(欲率奴)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니, 이미 길든 말(馬)에 기(騎)한 것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욕(欲)을 사(捨)하는 마음으로 질주 본능에 브레이크를 걸자. 그래도 여전히, 새로 산 헌 차여! 너와 함게 저 가을 바람 속을 가로지르고 싶구나. 마구마구 달리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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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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