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긴 흔적이 결국 나를 만듭니다.
얼마 전, 회사에 새로 취임한 리더 중 한 분이 사내 강연을 열었습니다. 참석해 보니,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후 하버드에서 MBA를 마치고 글로벌 기업에서 커리어를 쌓아온 분이었습니다. 누구나 알 법한 업계를 거쳐 이제는 장성한 자녀까지 둔, 흔히 말하는 ‘성공한 커리어’의 표본과도 같은 분이었지요. 강연에서는 커리어를 쌓는 데 귀감이 될 만한 다양한 경험담과 조언들이 오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참석자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고 그중 한 사람이 질문했습니다.
"오랜 기간 같은 회사에서 꾸준히 성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나, 해주실 만한 조언이 있을까요?"
질문자는 회사를 오래 다니신 분이셨고, 아마 익숙해진 회사 시스템 안에서 많은 고민이 있으셨던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리더분의 답변은 기대보다 간결했습니다.
"월급을 받는 만큼 회사 일에 성실하게 임하면 됩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약간의 반발심이 들었습니다. 왜일까요? 그 말이 틀려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성실함이라는 단어 뒤에 있는 어떤 불편함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성실하게 노력하면 반드시 보답을 받는다는 믿음이 실현될 때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농경사회에서는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밭을 갈고 한 해 동안 정성을 들이면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물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쌓아둔 곡식으로 긴 겨울을 날 수 있었고, 성실한 노동이 생존과 직결되었지요.
조금 더 가까운 과거를 떠올려 봅니다. 8~90년대처럼 경제가 성장 곡선을 그리던 시절, 회사에 입사하면 정년이 보장되고, 성실하게 일하면 승진과 연봉 인상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구조였습니다. 꾸준히 버티다 보면 결혼을 하고, 집을 사고, 자녀를 부양하는 일이 성실함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질 수 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단순히 ‘열심히’ 한다고 해서 반드시 보상이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요.
"열심히 말고, 잘해야지."
요즘 자주 들리는 이 말처럼, 이제 성실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전에서 '성실하다'를 검색해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성실하다 (誠實하다) : 정성스럽고 참되다 / 맡은 바를 꾸준히 수행하는 태도
성실하다는 말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 않아도 기꺼이 맡은 바를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 뜻에서 우리가 잠시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성실한 것이 그 행동 후에 오는 결과물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로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태도 그 자체가 성실함이지요.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종종 "성실한 태도"가 "미련한 태도"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단순히 성실하기만 한 사람은 앞뒤 따지지 않고 그저 묵묵하게 맡은 역할을 수행만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의어를 더 찾아봤습니다.
충실하다(充實하다) : 내용이 알차고 단단하다 / 역할을 다함
충실하다는 말은 단순하게 꾸준히 하는 것이 아닌, 맡은 바를 얼마나 알차고 단단하게 해냈는지, 그리고 그 결과물이 얼마나 완성도가 있는지에 초점을 둡니다. 즉, "성실하다"는 태도를 강조하고, "충실하다"는 그 태도가 만들어낸 결과를 강조하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아마 그 리더분이 하고 싶었던 말은 "자기 역할에 충실히 임하면 성과가 따른다." 였을 것입니다. 회사에서는 맡은 일을 알차게 해내고 그 결과물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결국 완성도가 높아야 성과로 인정받을 수 있고, 성과가 있어야 회사는 내 가치를 평가하기 시작합니다.
무한 경쟁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성과 없이 성실하기만 한 사람은 회사에서 오래 버티기 어렵습니다. (직장이 버텨야 하는 곳이라면 말이죠.) 처음 리더분의 답변을 듣고 약간의 반발심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실해야 할 곳과 충실해야 할 곳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것을요.
회사는 나의 결과물만 보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내 삶을 평가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회사라는 틀을 벗어난 삶을 산다면, 나는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삶을 성실히 살아냈을 때, 결국 우리 손에 남는 것은 그간 쌓아온 습관, 기록, 그리고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결과물들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성실함만으로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이지요. 내 손으로 꾸준히 쓴 기록은 어느새 한 권의 다이어리가 되고, 매일 반복한 습관은 결국 제 삶의 일부가 됩니다. 작은 성실함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눈앞에 확실한 결과물로 자리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종종 의도치 않은 기회와 행운을 만나기도 합니다. 애초에 계획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길이 열리기도 하고, 성실히 쌓아온 것들이 우연처럼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주기도 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성실함을 어디에 쏟을지를 늘 신중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실함은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결과물을 가져다 줄 것이니까요. 내가 쌓아갈 수 있는 것들, 내가 끝까지 통제할 수 있는 것들, 그것들이야말로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언젠가 내가 쌓아온 흔적들이 결국 진짜 나를 만들 것이라고 믿으며, 저는 오늘도 묵묵히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것들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