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커플한테 '상대방을 털끝만큼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이 존중이다'라는 말을 했었거든요.
그걸 본 구독자님이 이런 의견을 남겨주셨어요:
"정말 맞는 이야기인데 매번 적용이 어렵네요 ㅎㅎ근데 저는 서로 소통하면서 조금이라도 바꿀 '의지'가 있어야 '존중'도 가능한 것 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양말 똥그랗게 벗는 걸 매번 안 하지는 않아도 일주일에 한 두번정도는 제대로 벗는다면 존중해줄 수 있음 ㅋㅋㅋ ㅜㅜ근데 소통불가, 노력불가인 사람이랑은 그냥 멀어지는게 정신건강에 좋은 것 같아요 ..이것도 역시 저의 생각이죠 ㅎㅎ"
여기에 대댓글을 답니다.
0. 어려운 것이 맞습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부관계나 부모자식관계가 가장 어렵습니다. 기왕 말도 안되는 얘기 한 김에 특히 부부관계에 대해 쭈욱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이런 게소리도 있구나 하고 들어주세요.
1.
"상대방이 ~해야 존중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갖고 있다면, 내 마음의 목줄을 빼서 스스로 상대방의 행동에 걸어놓은 상태입니다. 내 기분과 태도가 상대방의 행동에 좌지우지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양말을 둥글게 벗나 보자'하고 계속 쳐다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기분도 꽁해지고(?) 스스로 노예의 자리로 (과장ㅎ) 걸어들어가게 됩니다. 상대방이 양말을 어떻게 벗느냐가 그 날 나의 기분을 크게 좌우하게 하기로 스스로 결정한 것입니다.
'나는 기분은 나쁘지 않은채로 존중만 하지 않을 뿐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사실 머릿속 개념이고,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순간 본인 기분이 좋지 않아집니다.
원래 의도는 나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의 행동을 바꾸려는 것이었는데, 어느새 거꾸로 상대방의 행동에 온통 좌지우지 되어버리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2.
"너가 어떻게 해도 난 널 존중한다"는 태도를 갖는 것이, 본인한테 가장 이득입니다. 상대방한테는 별로 이득도 아니에요. 내가 항상 친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상대방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마음이 좌지우지되지도 않는다면, 내가 좋은 겁니다. 내가 자유로워진 겁니다.
'나만 상대방을 항상 존중한다는 것은 나만 너무 손해보는 것 같은데요?'라는 마음이 든다면, 상대방이 얄밉게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고, 마음속에 쌓여있는 감정이 많은 상태입니다. 내가 이득을 본다는 기쁨보다, 상대방이 이득을 봤다는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진다는 거거든요.
그럴 때는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그래도 내가 한 때 (? ㅋㅋ) 좋아해서 선택한 여자(남자)인데, 그리고 나같은 보통 사람만나서 나름대로 살아보겠다고 고생하는데, 내가 좀 손해 보고라도 상대방한테 이득 주면 나름대로 좋은일 아닌가? 이 사람 힘든 일상에 내가 잠시나마 숨구멍 틔워주면 그것대로 보람있는 일 아닌가?."
3.
그래도 난 도저히 상대방이 편하게 사는 꼴 (내 희생으로) 못보겠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이고, 이건 얘기를 좀 더 들어봐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이유없이 이렇게 되지는 않으니까.
4.
"~하면 존중하겠다"는 것은 조건부 사랑입니다. 조건부사랑은 "합리적"입니다. 그래서 유혹적입니다. "내가 이걸 하고 너는 저걸 하기로 했잖아. 왜 안해" 이런 거요. "내가 너희 집에 이렇게 했으면, 너도 우리 집에 이렇게 할 것을 기대했어" 이런거요. 너무 합리적이고 상식적이어서 반기를 들 생각조차 안드는 것들이요.
부부사이의 합리성의 끝은 둘 중 하나입니다. 원수거나 남남이거나.
정이 많은 스타일들은 원수로 가고, 건조한 스타일들은 (실질적) 남남으로 갑니다.
"내가 온갖걸 다 해줬는데도 상대방은 당췌 맞춰줄 생각이 없다. 도무지 상식이 안통하는 인간이다"로 가거나,
"내가 자기 뜻 맞춰줬다고 잠깐 웃어주는구나. 참 가증스럽다'"로 갑니다.
따듯함을 느끼고 싶어 빚어낸 관계에 내 손으로 합리성의 레이저를 쏘고나서 남는 것은 건조한 거래밖에 없습니다. 이 때 남 원망할거 없습니다. 내가 쐈으니까.
5.
여담이지만, 이런 조건부사랑을 자녀한테 하면, 자녀는 평생 짊어지고가야 할 불안을 갖게 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룰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천체물리학자의 말을 아무리 들어도 알아듣기 어려운 것처럼요. 아이들은 어른들이 준 룰을 지키기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살빠지는지 알아도 계속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것처럼요. 내 존재가치가 이해하기 어렵거나 지킬 수 없는 룰에 의해서 결정되면, 깊은 불안을 갖게 됩니다. 내 있는 그대로를 열어보이는 것을 어려워하는 성인으로 자라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