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
봄은 우리 가족에게 참 힘든 계절이다.
꽃가루 알레르기로, 나를 제외한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힘들어한다.
아마 아내의 체질이 아이들에게 이어진 것 같다. 아내도 처가 어른들의 체질을 닮았을 테고.
첫째는 돌 무렵부터 피부과를 다녔다. 비염도 늘 달고 살았다. 한 번 예약 잡기도 어려운 병원에 처음 진료를 받은 이후로 7~8년 넘게,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피부 검사를 받았다.
둘째도 비슷한 체질이었다. 누나보다는 덜했지만, 봄만 되면 특히 더 힘들어했다. 비염, 알레르기, 피부 트러블까지 겹친 해도 있었다. 그때도 나만 멀쩡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건 좀 아빠를 닮지…’
하지만 반대로, 아이들이 내성적인 건 나를 닮았다.
자기표현이 서툴고, 조금만 혼내도 금세 주눅 드는 모습이 어린 시절의 나와 꼭 닮아 있었다.
아내는 다르다. 표현이 분명하고, 당당한 사람이었다. 그럴 때는 또 속으로 생각한다. ‘이런 건 좀 엄마를 닮지…’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나는 두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아이들의 긍정적인 면을 잘 보지 않고 있었다는 것. 무엇이 부족한지, 누구 탓인지 따지기에 바빴다. 그게 유전인지 아닌지 따지기보다 지금 내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키워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었는데 말이다.
둘째는, 체질이 닮은 건 말 그대로 유전일 뿐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 하지만 내성적인 성향은… 꼭 유전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만든 건 아닐까? 어릴 적 내가 가장 싫어했던 내 모습을 내 아이에게 물려주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내 아이들도 그대로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만약 그런 대물림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서 멈춰야 하지 않을까?
그 질문이 한동안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다른 아이들이 다니는 수많은 학원들을 우리도 똑같이 보내야 할까? 우리에겐 그럴 여유도 없지만, 그게 과연 ‘좋은 부모’의 조건이 되기도 할까? 세 아이를 키우는 이웃을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육아 이야기가 오갔다. 그분은 아이들을 학원에도, 방과후 수업에도 보내지 않는다고 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들이 집에서 보낸다고 했다.
나는 물었다.
“불안하지 않으세요?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질까 걱정되지 않으세요?”
그분은 웃으며 말했다.
“전혀요. 억지로 학원에 간다고 그 아이가 행복할까요? 진짜 공부가 될까요? 학원 가는 아이들의 눈에서 행복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 말을 들으며 나도 조용히 마음을 정리해 보았다. 지금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정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할 수 있게 돕는 일이 아닐까. 실패도 겪고, 시행착오도 겪으며 스스로 배우는 힘. 그 힘을 기를 수 있게 곁에서 기다려주는 것. 그게 부모 아닐까.
같은 학원 개수를 맞추지 않으면 우리 아이가 뒤처진다고 느끼는 건 정말 아이를 위한 마음일까? 아니면, ‘좋은 부모’로 보이고 싶은 내 불안의 투사일까?
우리는 모두 같은 교문으로 들어가야 했고, 같은 길을 걸어야 했고, 서로 경쟁해야 했고, 거기에서 뒤처지면 패배한 인생일지도 모른다고 배워왔다.
그 마음은… 나만 겪으면 족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