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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Oct 28. 2019

우리 동네에 자주 나타났던 이영애 씨

학창 시절 우리 동네 정류장에는 이영애 씨가 자주 나타났다. 가끔 심은하 씨도 나타나고. 하지만 사람들은 환호하지 않았다. 놀라거나 야유했을 뿐. 왜 그랬을까? 그 아름다운 분들이 우리 동네에서 무슨 짓을 했길래...? 사실, 그때 그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 없었다. 그곳에 있던 건 단지 가련한 한 여자아이였을 뿐이다.


5살 차이 나는 오빠가 있다. 평범한데 작정하면 가끔 상태가 좀 안 좋아진다. 같이 다니기 창피하다. 주책바가지에 너무 촐싹거려. 되도록 모르는 사람인 척하고 다녀야 한다. 눈을 마주치거나 아는 척을 하는 순간 그날 하루는 망쳤다고 봐야 한다. 집에서는 웃긴 얘기들을 하도 해서 죽을 맛이다. 이게 그냥 재밌는 오빠네, 좋겠네가 아니다. 간지럼 태우기가 어느 순간을 넘어서면 고문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나도 그 상태와 같았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랬다. 일부러 웃긴 얘기를 계속해서 내가 이불에 오줌을 쌀 때까지 웃겼다. 그러면 엄마한테 나만 혼나고 지는 모른 척. 자는 척. 귀를 막고 있으면 앞에 와서 주접을 떤다. 방심을 하는 순간 한번 터진 웃음은 진짜 화를 내며 엄마를 찾으며 우는 서러운 울음으로 끝을 맺는다.


이 인간은 커서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 가기 위해 정류장에 있으면 슬그머니 내 주위에 선다. 그리곤 놀란 목소리로 소리친다. "와! 이영애 씨 아니세요? 저 팬이에요!" 피곤하고 졸려하던 사람들은 고개를 번쩍 들고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 하이에나 같은 인간은 벌써 발을 뒤로 뺀 후고 사람들은 덩그러니 남아 있는 나를 보며 웃는다. 고개를 젓는 사람, 킥킥 거리는 사람, 야유를 보내는 사람,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다시 한번 나를 보는 사람, 나는 혼자 쩔쩔매매 얼굴이 빨개진 채 서 있다. 자주 이영애가, 간혹 심은하가 사람들을 웃기거나 비웃거나 화나게 만들었다.


그런 일들이 하루 이틀이 아닌지라 아침마다 불안해진 나는 정류장에 도착하기 전에 오빠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해야 했다. 정류장 근처에 웬수 같은 인간이 보이면 나는 오빠가 사라져야 안심하고 정류장으로 향했다. 어느 날은 보이지 않길래 홀가분한 마음으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왔고 사람들이 올라탔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리고 나는 버스 맨 뒤로 가서 앉았다. 몇 정거장이 더 지나고 버스 안이 좀 여유로워졌을 때 주위를 보니...., 뙇!!!! 버스 중간에 오빠가 보였다. 절대 들키면 안 된다. 먼저 간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불안해진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창문에 기대고 머리카락으로 커튼을 치듯 얼굴을 가렸다.



하이에나들은 아주 약한 피 냄새도 잘 맡는다고 한다. 사냥감이 보이면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지. 어떻게 알았는지 그 하이에나 같은 오빠는 벌써 내 앞에 와 있었다. 하이에나가 이를 드러내며 나를 보고 있었다. 너무 놀란 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입모양으로 경고했다. 죽! 는! 다! 거친 입모양과 다르게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불안해, 저 제정신 아닌 자가 뭔 짓을 벌일 것 같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어쩌지? 내릴까? 다음 차를 탈까? 아니야, 내가 의자에서 일어 선 순간 분명 시작할 거야. 아 미치겠네. 저거 죽일까?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자리에 앉아서 불안을 견뎌야 했다.


그리곤 결심했다. 자자. 자는 거야. 저 미친놈이 무슨 말을 하든 말든 나는 모르는 사람처럼 자는 거다. 그래, 바로 그거야! 하이에나가 나를 힐끔대며 이를 드러내는 걸 보며 다시 한번 소리 내지 않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꺼!져! 그리고 나는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차가 덜컹거리며 얼마나 달렸을까... 싸늘하지만 조용하다. 포기했나? 역시 그렇군. 하긴 내가 모르는 사람인 척 자고 있는데 할 수 있는 게 없겠지. 음하하하. 내 대범함에 포기한 것 같아 뿌듯했다. 나는 마음을 놓고 이제 진짜로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 순간, 차가 정류장에 정차하고 뒷문이 열리자 하이에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버스 안에 울려 퍼졌다.


"야! 맨 뒤에 앉아서 자는 애! 너 이영애랑 똑같이 생겨서 진짜 놀랐드아!"


나는 얼음처럼 굳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버스 밖에 내려선 하이에나는 내 창문 쪽으로 와서 창문을 톡톡 두드려 확인사살까지 했다. 죽고 싶다. 이제 어쩌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그 나이의 남자들은 왜 그리 장난기가 많은지. 아니면 우리 집 또라이와 비슷한 놈들인지. 킥킥 거리며 지들끼리 말하는 게 들린다.


"진짠가?" "내릴 때 보면 알겠지." "우리 동네에 그렇게 이쁜 애가 있나?" "자나 봐, 잘 안 보여."


아니야, 기대하지 마, 보고 싶지 마. 이 것들아. 아.... 난 여기까진가 보다. 더는 아니야. 죽고 싶다 진짜. 저건 오빠가 아니라 또라이다. 하이에나다. 악마다. 이제 나는 일어날 수도 없다. 고개를 들 수도 없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려야만 나는 내릴 수 있다. 차라리 그럴까? 아무튼 오빠 건 뭐건 저거 오늘 집에 가면 죽인다. 진짜.



그냥 모른 척 내리면 되지 뭐 그리 호들갑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당시의 나는 사춘기 초입이었다. 게다가 그냥저냥 평범한 얼굴이었다면 그렇게 민망하지 않겠지만.


우리 집 하이에나의 외모부터 말하자면, 개그맨 정준하와 야구선수 이범호를 섞어 놓은 거 같이 생겼다. 그래. 이 정도면 같은 핏줄인 내 상황이 어떤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 둘을 섞은 얼굴에 최양락의 단발머리를 씌운 상태가 바로 나다. 근데 저 하이에나가 매번 이영애 심은하를 운운하며 나를 욕보이는 것이다. 진짜 신고할까?


참고로 우리 집 초딩이 친구들과 집에 온 날, 자기가 평생 만나 본 제일 웃기고 이상한 사람이 외삼촌이라고 친구들과 얘기하는 걸 들었다. 맞는 말이다.





진짜 오늘은 집에 가면 가만 안 둔다고 이를 갈던 내게 운명의 시간이 도래했다. 어쩔 수 없이 내려야 할 정류장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 앞엔 하이에나에게 낚인 불쌍한 인생들 몇몇이 서 있다. 아, 나는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저거 어릴 때 날 웃겨서 기어코 이불에 오줌싸개 만들 때부터 알아봤다. 그때 해결했어야 했는데 내가 미쳤지...


아, 이제 어쩌나, 이영애는 어쩌자고 그렇게 아름다우셔서 매번 나를 이리 괴롭게 만드시는 건가. 이영애 책받침이라도 있으면 얼굴을 가리고 내릴 수 있는데, 진짜 그렇게 내릴 수 있는데...  내리면서 손도 흔들 수 있는 나인데 말이다. 하지만 없다. 내게는 이영애 책받침이 없다......... 고로 나는 망했다.


버스가 달린다. 이제 어쩔 수 없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내려야 해. 지금이 아니면 더 심각한 상황이 올 수 있어. "아저씨 내려야 돼요!" "못 내렸어요. 잠깐만요!" 같은 소리를 질러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면 내 인생은 진짜로 여기서 끝이다. 일어서. 어서 일어나!


근데 어떻게 일어나지?

강렬하게 '비. 켜. 라.' 째려보면서 일어설까? 아니면 알아서 비키도록 '으헤헤헤~' 미친 사람인양 일어설까? 아, 어쩐단 말인가. 시간은 자꾸 흐르고 내려야 할 정류장은 점점 다가오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더 이상은 무리다. 여기서 상황이 더 나빠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을 가렸던 커튼을 쳤다. 나를 욕보이고 내린 하이에나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내 앞에서 기대에 부풀어 있던 하이에나 무리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 모르겠다. 내가 그 순간의 기억을 잃었던 걸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렴풋이 내가 지나간 뒷통수 쪽에서 자기들끼리만 들리게 '흠.흠..'이나, '야, 니가 가서 그 사기꾼 데려와' 같은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아니, 확실히 들었다. 죽인다죽인다내가 꼭 죽인다. 거친 말을 되뇌며 남학생들 무리들을 비집고 나와 버스에서 내렸던 기억만이 생생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기대하던 녀석들이 그래도 우리 집 하이에나 같은 수준은 아니었던 듯하다. 혹시라도 그런 녀석이 한 놈이라도 있었다면 분명 창문을 열고 "잘 가요! 이영애 씨!" 소리를 질렀을 수도 있다. 나는 좋지 않은 기억들을 간혹 되새기는 나쁜 성향을 가졌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며 그런 놈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떤다. 아, 소름 끼쳐... 진짜 그랬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그때 그런 녀석이 있었다면 아마도 학교를 안 갔을지도 모른다.


그날, 집에 가서 나는 울고불고 저 인간이랑 나랑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소리치고 난리를 부렸다. 엄마 아빠는 오빠를 혼냈지만 하이에나는 사자 앞에서만 얌전하게 알았다고 대답 했을 뿐이다. 어쩔 수 없다. 내가 나를 지켜야지. 나는 밖에 나갈 때면 늘 주위를 더욱 주도 면밀하게 살폈다. 그리곤 기회를 노렸다. 쥐도 구석으로 몰면 문다는 걸 알려주마. 다짐하며. 좋아 반격이다.


그리고 어느날, 남자들의 영웅이자 여자들의 로망이었던 장국영이 문득 떠올랐다. 너도 맛 좀 봐라. 정류장 근처에 숨어있다가 하이에나가 오는 걸 보고 기회를 노렸다. 나는 하이에나의 어깨를 잡고 소리쳤다. "야! 장국영이랑 똑같이 생겼잖아!" 나는 재빨리 튀었고 여지없이 사람들이 하이에나를 바라보았다. 성공이다. 어디 너도 개망신 한번 당해보지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내 생각은 틀렸다. 나는 내 혈육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다.


이 또라이가 글쎄 깜짝 놀라는 가 싶더니 갑자기 양손을 번쩍 들고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하며 걸어 다니는 게 아닌가.


아... 운명이구나. 이 사람은 진짜 또라이였구나.


나는 인정했다. 저분은 내가 개길 수 있는 분이 아니구나. 그동안 괜한 감정들만 소비하느라 나만 고달팠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나 보다. 이젠 밖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분에게 분노하거나 소리치지 않는다. 그저, 제발 멀쩡히 걷다가 느닷없이 내 옆에서 앞구르기 같은 거나 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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