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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Nov 20. 2019

[붕어빵] 속상함을 화로 표현치 말지어다

"너 바보야! 그걸 주고 오면 어떡해! 아이고 답답이! 답답이! 너를 어쩌니! 왜 이리 애가 여물 지를 못해!"

아, 한 번만 하지. 왜 계속했어. 지금 생각해도 감정이 올라오네. '바보, 답답이 2, 널 어쩌냐, 여물 지를 못해' 한 번만 해도 되는 말을 감정적으로 쏟아 내다보니 아이의 심장을 다섯 번이나 찍어 누르셨네.


젊은 시절의 아빠는 불같은 성격이었다. 지금이야 아이들에게 매를 들거나 화를 내는 게 교육상 나쁘다는 걸 다들 알고 있지만 80년대는 부모가 자식에게 매를 드는 걸 주저하지 않던 때였다. 배우지 못한 부모들이 더 많았고 먹고 살기가 급급한 상황들이기도 했으니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시대상황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당시의 어렸던 내 마음엔 깊은 상흔이 남았다.


비가 오던 날이었다. 폭우가 쏟아지듯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내 손에는 우산이 있었지만 부모님도 오지 않고 우산도 가져오지 않았던 친구의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우산을 쓰고 학교를 나섰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과 어제 본 TV 속 연예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향했다.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빗발이 더욱 거세어졌고 우리는 서로의 몸 쪽으로 바짝 붙어 걸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같은 동네가 아니었다. 갈림길이 나오자 친구는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친구의 어깨와 가방이 잔뜩 젖어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우산을 친구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너 쓰고 가. 나는 너보다 달리기도 훨씬 빠르니까 금방 뛰어갈 수 있어. 너는 엄청 느리잖아."


그래도 될까 걱정하는 친구에게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주곤 빗속으로 뛰었다. 빗속을 뛰는데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갑자기 내가 굉장히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산수를 60점밖에 못 맞는 아이였지만 빗속을 뛰고 있는 지금의 나는 늘 100점을 맞는 우리 반 우철이보다 대단한 사람처럼 생각됐다. 우히히히~ 갑자기 웃음이 터진 나는 신발주머니를 머리 위로 들고 스포츠카처럼 달렸다. 그리고 빗속을 달리는 내내 나는 엄마 아빠에게 들을 칭찬을 떠올렸다.


'역시 우리 딸이 최고구나.'

'너는 어쩌면 친구를 그렇게 생각해 줄 수가 있니.'

'내가 정말 마음이 예쁜 아이를 낳았구나'


엄마 아빠가 나한테 그런 말들을 하며 꼭 안아주겠지. 내 젖은 머리를 말려주고 따뜻한 우유를 데워 줄 거야. 그러면 내가 집으로 뛰어 오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말해줘야지.


우산을 함께 쓰는 이쁜 아이들


하지만, 모든 것은 내 예상과 달랐다. 비를 쫄딱 맞고 속옷까지 젖어서 슈퍼의 문을 연 나를 보며 아빠는 인상을 썼다. 내가 쭈뼛거리며 친구에게 우산을 양보했다는 말을 하자 아빠는 소리쳤다. "너 바보야! 그걸 주고 오면 어떡해! 아이고 답답이! 답답이! 너를 어쩌니! 왜 이리 애가 여물 지를 못해!" 처음으로 나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순간의 내 자신은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나는 맨날 100점을 맞는 우철이 같은 대단한 아이가 아니었나 보다. 역시 나는 60점짜리일 뿐이었다고 느꼈다.


아빠가 매를 든 것도 아니었고 그저 자식이 걱정되는 마음에 뱉어 낸 말들이었는데 왜 그리도 서러웠을까? 어린 나는 아빠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없었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자신을 향해 폭발하는 화의 존재만 느껴졌으니까. 난 좋은 일을 하고 온 것 같은데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걸까. 아빠는 왜 나에게 그런 슬픈 말들을 하는 걸까. 서러웠고 슬펐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빠는 내가 마음에 걸렸는지 잠시 뒤에 붕어빵을 사서 들어오셨다. "니가 감기 걸릴까 봐 속상해서 그런 거야." 좀 더 커서야 아빠의 그 마음을 알게 됐지만 아이들은 어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아니, 절대로 모른다. 아이들의 행동엔 다 이유가 있다. 왜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한 번쯤 물어보고 나서 본인의 감정을 표현해도 해야 한다.


육아는 대물림된다고 했던가. 어이없게도 나 역시 아이에게 속상함을 짜증스러운 말로 표현할 때가 있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고 살았건만 허무하게도 그런 일들이 종종 있다. 그럴 때면 다시 마음을 다잡고 말한다. 미안하다고. 엄마가 너무 속상해서 잠깐 목소리가 너무 크게 나왔다고.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니 말을 먼저 듣고 싶다고 다시 물어본다. 그러면 아이는 조곤조곤 자신의 말을 하고 그 뒤에 엄마가 왜 속상했는지를 말해주면 아이는 어려도 이해한다.


아빠의 그 말. 붕어빵을 주며 내게 하던 그 말이 무슨 소린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던 나는 붕어빵을 씹어 먹으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속상하면 걱정을 해줘야지 왜 화를 내? 내 심장을 다섯 번이나 짓밟았는데 그게 나를 생각한 거라고? 어른들은 다 거짓말쟁이야. 그냥 내가 미워서 화내 놓고 이제 와서 걱정돼서 그런 거라는 게 무슨 말이야. 다 자기 멋대로야! 속으로 아빠에게 외쳤다.


눈물이 뚝뚝 떨어진 붕어빵이 꼭 내가 뛰어 온 빗물에 젖은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그때의 잘 구워진 붕어빵은 나에겐 그저 비에 젖은 붕어빵일 뿐이었다. 맛도 없었고 괜히 먹고 싶지 않아서 10개 중에서 2개만 먹었다. 아 참, 요즘엔 잉어빵만 먹는다.

역시 빵은 잉어빵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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