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추워 점퍼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운동을 하는데 모자가 큰 지 자꾸만 안경을 건드리는 게 신경을 내내 거슬렸다. 몇 번을 고쳐 쓰다가 안 되겠다 싶어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고 공원을 뛰었다. 안경을 벗으면 사물의 형태만 보일 정도의 시력을 지녔다. 알은체를 하지 않는다면 옆으로 지인이 지나가도 모를 만큼 눈이 나쁘다. 글쎄 그게 하도 오랫동안 이 상태로 살아온지라 이게 어느 정도 눈이 나쁜 건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안경을 벗고 천천히 공원을 뛰면서 주위를 보니 살짝 흐리멍덩하게 보인다. 평생 안경을 벗고 다녀 본 적이 없는데 어쩐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아니, 편하다. 공원 한 곳에 쌓여 있는 쓰레기 봉지들도 전처럼 그다지 거슬리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애정행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늘 내 눈에 날카로웠던 가로등은 마치 달무리처럼 부드럽게 뭉그러져 보인다. 나는 기분이 좋아진 채로 속도를 조금씩 올리며 공원을 달린다.
내 행동과 마음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어떨까? 나는 늘 내 행동도, 말도, 기복이 심한 마음도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를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곤 했다. 혹은 내가 아닌 타인의 행동과 마음을 굳이 분석하지 않으면 어떨까? 왜 우리는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그렇게도 분석하고 수집하고 분류하며 나를 혹은 타인을 규정하려 하는 걸까? 물론 그런 행동과 결과들이 꼭 필요한 순간도 있지만 가끔은 안경을 벗고 보듯 주위를 바라본다면, 휴식이 필요한 자들은 마음의 평화를 잠시라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타인과 의견 충돌이 생기거나 내가 억울한 순간을 맞이 했을 때,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찾으려 애쓴다. 내 것이 당연히 맞는데, 네가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데. 자 봐라. 너의 행동이 얼마나 이치에 맞지 않는지 내가 알려줄게. 우리는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모든 것을 찾아낸다. 그러면 또 상대는 상대대로 나름의 논리를 펼친다. 아마도 그건 나도 당신도 그리고 모든 인간들이 지닌 당연한 심리적 행동적 특성이겠지. 자신을 변호하는 것. 나를 방어하는 것. 다름과 맞음을 분석하고 평가하여 마침내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
하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순간에 현미경처럼 자세히 들여다본다고 해서 그것이 정답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인간은 항상 실수를 하고, 인간은 항상 불안에 떤다. 어느 순간엔 그것이 잘못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범하게 되는 일들도 있고, 나도 모르는 순간 내 의지와는 다르게 되는 일들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의 모습이 한 인간의 모든 면을 설명하는 게 아닐진대, 우리는 가끔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상대를 판단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것은 나도 다르지 않다. 나도 누군가의 한 순간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일들이 종종 있다. 상대를 알지도 못하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타인을 규정지어 버리는 것이다. 혹은 대상자가 내가 되기도 한다. 무의식 중에 흘린 쓰레기, 화장실이 급해서 사람들을 불쾌하게 밀치고 달리는 일,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순간 인상을 쓰던 찰나의 모습들은 누군가에게 나는 경우 없고, 무례하고,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고 마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타인은 나를 알지 못하므로 순간의 모습을 보며 평생의 나를 판단하게 된다. 그런 일들은 생각보다 많이 일어난다. 내가 모르는 순간에도 타인은 나를 판단하고 규정한다. 상대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건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억울하기만 한 건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존재일 수 없다. 순간순간 우리는 그런 상황의 대상자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남을 함부로 판단해 버리는 주체자가 되기도 하니까. 비난하기도 하면서 억울하기도 한 이중적 존재.
안경을 벗으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날카로움을 조금쯤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은 누구를 위함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일. 저 다리 밑의 미세한 사정이나 도심의 속내까지 알 필요가 무언가. 내 눈에 들어오는 세세한 더러움과 미움들은 세상의 한 면일뿐, 때로는 그저 세상에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만 알면 되는 게 아닐까. 가끔 아이와(애석하게도 내 아이도 눈이 몹시 나쁘다.) 밤 산책을 하며 둘이 안경을 코끝으로 내려 건 채, 흐릿하게 보이는 맨 눈으로 세상을 둘러보며 대화를 나눈다.
눈을 괴롭히는 날카로운 거리의 불빛들도, 말라가며 지저분하고 떨어지기 직전인 나뭇잎들도 안경 너머로 보면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존재로 보인다. 어쩌면 흐리멍덩하게 보게 되는 다른 종류의 의미가 실은 진짜 그것들의 이름은 아닐까? 거리의 수많은 신호등과 나무들은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예쁜 트리처럼, 달콤한 솜사탕처럼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것들이니까 말이다.
지금 아파트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공원은 풍성하고 알록달록한 나뭇잎들로 가려져 그 속은 보이지 않는다. 차가운 운동기구들과, 다 깨진 공원의 바닥과, 구석에 쌓아 놓은 쓰레기 더미들은 풍성한 나뭇잎들로 가려 위에서 보면 공원은 그저 붉게 물든 숲으로 보인다. 하지만 겨울이 깊어지고 나뭇잎들이 모두 떨어지면 날카롭고 사나운 가지들만이 남을 것이고 가지들 사이로 공원의 모든 것들이 보이겠지. 메마른 가지들 사이로는 날카로운 바람과 나뭇가지들이 부딪히는 거친 소리들만 들릴 것이다. 아마도 풍성하고 부드러웠던 바람의 결과 나긋나긋하던 나뭇잎의 노래가 몹시도 그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