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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Mar 04. 2020

진정한 애서가는 전자책 따위 읽지 않는다

"이거 한번 보라니까..."

"혼자 많이 봐. 난 그거 너무 별로야."


k는 전자책을 자주 본다. 밤에 눈 나빠지게 핸드폰을 왜 자꾸 보는 거냐 소리치면 전자책을 들어 보이며 멀뚱거린다. 사실 자꾸 전자책을 사는 것도 마뜩찮고 잘 시간에 몇 시간씩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볼 거면 나가서 진짜 책을 들고 볼 것이지...


전자책이라니. 그래 21세기에 전차책으로 읽는 거 이상한 일은 아니지. 책을 안 읽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거고. 하지만 전자책을 나는 책으로 보지 않는다. 뭐랄까. 그건 너무.... 책이 아니잖아!! 진정한 애서가는 전자책 따위는 읽지 않지.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내가 전자책을 손에 쥐게 되는 날이 오는데...

그것은 바로 거대한 책 한 권 때문이었다. 이 책이 한참 유행할 때도 나는 관심이 없었다. 재밌다는 말들이 많았지만 남들이 재밌다니 어쩐지 더 읽기가 싫어져서 어영부영 세월이 흘러버렸고 그렇게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집안일은 해도 해도 티가 나지 않고, 글은 써도 써도 돈이 되지 않았고, 돈이 되는 일은 자존감만 깎아내리던 날들. 지치고 울적한 날들이었다. 무언가 즐길게 필요했고 그때 느닷없이 머릿속에 책 이름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분권으로 대출을 하자니 다른 책을 빌리기가 어려워 합본으로 신청했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영접한 책은 거대해도 너무 거대했다. 낮에 책상에서 읽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어머나, 책은 또 왜 이리 재밌지? 자기 직전까지 읽어야 했다. 놓칠 수 없는 신박한 이야기야! 하지만 저 거대한 책은 잠들기 전까지 읽기에는 무리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나... 잠시 고민을 하다가 k에게 혹시나 싶어 물었다.

"이 책은 없겠지?"


하지만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쓰윽 웃으며 내미는 전자책. 받아 드는 순간까지 마뜩잖은 게 사실이었지만 뒷이야기가 너무도 궁금해서 어쩔 수 없이 전자책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이 지나고 나는 운명처럼 전자책과 사랑에 빠졌다. 이거슨 신문물!



언제 어디서나 내가 원하는 책을 골라 읽을 수 있다니!(k가 그렇게 계속 장점을 말 해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몇백 권씩 들고 돌아다니는 것과 같지 아니한가! 아이가 수영 수업에 들어갈 때면 읽을 거라곤 들고 간 책 한두 권일 뿐이었는데 이건 뭐, 우오오오~ 내가 원하는 책을 마구잡이로 골라 볼 수 있었다. 고를게 너무 많아서 막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그 뒤로 매일 저녁 침대에 누워 이것저것 책들을 눌러보며 끼요오옷, 탄성을 내질렀다. 책하나를 찾으려면 어느 책꽂이에서 봤었나 간신히 기억을 떠올리고도 책꽂이 깊숙한 곳을 여기저기 뒤져서 찾아야 하는 수고를, 전자책은 그냥 막 누워서 막 손꾸락 하나로 막 촥촥 슥슥 찾아내서 읽을 수 있어! 신세계!


"오오. 이거 뭐야! 이 좋은 걸 왜 지금 줬어!" 

(내 반응이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연신 ㅉㅉ 혀를 차는 k)

당신에게 사과한다. 그 오랜 시간 무시와 억압과 핍박 속에서도 꿋꿋하게 전자책들을 사모으고 지키고 있던 k에게 경의를.



종이책이 산책이라면  전자책은 순간이동이다. 종이의 질감과 냄새. 책의 모양새와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는 행위가 천천히 공원을 거닐며 나무와 새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바람과 빗방울의 촉감을 느끼며 감상하는 거라면, 전자책을 읽는 행위는 축지법을 사용하기도 하고 이곳저곳을 휙휙 넘나들며 순간이동을 하는 것과 같다. 종이책이 천천히 하늘을 나는 경비행기라면 전자책은 제트기다. 쓰다 보니 재밌네. 재밌으니까 하나만 더 비교해보자면,


그러니까 이런 것과도 같다.

향긋한 오렌지 향기를 따라 길을 걷다 만난 오렌지 나무들. 나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나무들을 둘러보며 행복하다. 나무에서 오렌지 하나를 따고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오렌지향을 코끝으로 가득 느낀다. 동글동글한 촉감을 느끼며 껍질을 천천히 까면 더욱 진해지는 향기와 함께 침샘이 자극되어 행복은 극대화된다. 탱글탱글한 과육의 질감과 상쾌하고 싱그러운 과즙의 맛. 바람결에 오렌지 향기를 느끼며 나무 사이로 들어서고 오렌지 한 알을 까서 입안에 넣는 순간까지의 행위들. 그것이 그러니까 우리가 종이책을 만나는 순간과 다름없다.



그러면 전자책은..... 모두가 예상하듯이.

미닛 메이드?

미닛 메이드가 어때서! 맛있다. 편하다. 원하는 순간 우리는 바로바로 손에 넣을 수 있고, 뚜껑만 돌리면 오렌지의 상쾌함이 쏟아져 나온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게다가 간혹 알알이 과육이 씹히는 주스도 많이 나온다. 오렌지란 무릇, 나무에서 따 먹어야 제맛이니 미닛메이드는 필요치 않다고 말할 순 없다. 단언컨대 필요하다. 언제 어디서라도 나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을 테니까.


전자책의 장점에 굴복했다. 아니, 정확히는 매료되었다. 종이책과 전자책. 이제 무엇하나 버릴 수 없다. 받아들이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눈과 귀를 꽉 닫은 채로 오랜 시간을 버렸다는 게 어이없이 느껴진다. 내가 그렇게도 전자책을 무시했다니, 새로운 문화의 장점을 알아볼 생각도 없이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이 최고라고 우기며 살았다니, 나는 정말 꼰대가 아니었던가.


나는 이제 전자책과 종이책을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즐기고 있다. 종이책으로 느끼는 만족감을 원할 때는 천천히 책장 앞으로 다가가고, 바쁘고 급할 때는 전자책을 꺼내 든다. 전자책을 알고 난 뒤에 행복감이 몇 배로 증폭된 느낌이랄까. (응? 어떻게 끝내지? 아무튼 전자책 만세!)



안녕!

나는 이제 펭수처럼 두 개 다 소중하게 들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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