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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Mar 25. 2020

오페라를 보는 밤

뉴욕 메트의 오페라를 무료로 시청할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에 내내 오페라에 빠져 지낸다. 유명한 [카르멘]과 [라보엠]을 놓치고 [일 트로바토레]부터 보기 시작한 게 좀 아쉽지만 아직 남아있는 오페라들이 많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오페라만 울려 퍼지는 순간들을 맞이하며 즐거운 밤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제의 작품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화면을 죽이고 그냥 끄적거린다. 순식간에 오페라와 사랑에 빠져버렸기도 했고.



[일 트로바토레]는 우리나라 테너 가수 이용훈이 주인공 만리코 역으로 나와 반가운 마음에 더 애틋하게 본 것 같다. 그의 상대역인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의 연기와 노래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깜짝 놀랐다. 목소리를 악기처럼 쓰는 놀라움! 무대의 화려함이나 세련됨은 없었지만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다음 날 [라 트라비아타]를 볼 수 있다는 기대를 하며 잠이 들었는데 그날 밤 꿈에 이름 모를 오페라가 나와서 자는 내내 기분이 좋았을 정도.



[라 트라비아타]는 그 옛날 우리가 [춘희]라고 알던 오페라다. [카르멘]과 [라보엠]을 놓친 것도 속상한데 하필 시댁에 가야 하는 날이라 일찍 일어나 출발하기 직전까지 세 시간을 홀로 감상하는 기쁨을 누렸다. 마지막엔 시간이 급박해 간간이 자리를 뜨며 나갈 준비를 하느라 한 번에 몰아치는 감정을 오래 느끼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반쯤 서서 봤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의 애절한 연기와 노래!

      


[연대의 딸]은 솔직히 큰 기대 없이 자리에 앉았다. 내 기준으로 그리 유명하지 않다는 생각에 내용을 훑어보고 시청하기 시작했는데 작품이 어찌나 재밌는지 깜짝 놀랐을 정도다. 시간이 됐다면 그 자리에서 한번 더 보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주인공 마리를 연기하는 소프라노 나탈리 드세이가 말도 못하게 깜찍하다! 말괄량이 삐삐의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다 쓴 듯 시종일관 유쾌하고 반짝반짝. 신나는 코믹극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겨운 작품이었다. 여주인공뿐 아니라 모든 성악가들의 감초연기가 즐거워 보는 내내 웃음을 터트리게 되는 작품. 아, 너무도 사랑스러운 연대의 딸. 마리!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도 기대 없이 시청했는데 주인공이 [일 트로바토레]의 안나 네트렙코라서 감동이 두배였다. 어찌나 절절한 아리아를 쏟아내는지. 연기도 엄청나고. 마지막 '광란의 장면'에서 흰 드레스에 피를 묻힌 채 쏟아내는 열정적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였다.  



[유진 오네긴]은 처음 시작하는 무대가 너무도 소박하고 단순하여 너무 신경을 안 쓴 것 아닌가 툴툴대며 시청하기 시작했다. 무대에 뭐가 너무 없어! 하지만 오페라가 끝나고 나니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질 정도로 너무도 마음에 든 작품이었다. 소박한 시골처녀 타티아나를 표현하기 위한 무대장치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무대와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도 찰떡! 르네 플레밍이 연기한 타티아나도 매력적이었지만 오네긴! 오네긴! 오네긴역의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가 어찌나 오네긴 그 자체인지!


아 미치도록 얄미운 오네긴! 바리톤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는 보는 내내 쥐어박고 싶고 걷어 차고 싶을 만큼 나쁜남자 역을 훌륭하게 해낸다. 그의 아름다운 은발도 오네긴 그 자체이다. 상대를 깔보고, 잘난 체하고, 시니컬하고, 장난기 있고, 가벼운 악의에 찬 표정들을 어쩜 그리 완벽하게 표현해 내는지 보는 내내 눈을 뗄 수가 없다. 극이 끝나고 환하게 웃는 인터뷰까지 다 보고 완전히 팬이 돼버렸다. 아무래도 DVD를 사야 할 듯.  

하지만 검색을 하다가 안타까운 일을 알게 됐다. [일 트로바토레]에 출연했을 당시가 투병 중이었다고... 슬프지만 지금은 고인이 되셨다고 한다.



아,,, 그리고 [트리스탄과 이졸데].... 내가 이 글을 끄적이고 있는 이유이다. 이 오페라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끄적이는 대신 내내 오페라의 밤을 즐기고 있었을 듯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너무도 보고 싶던 오페라였는데.. 무척 기대했던 작품이었는데.. 기대가 컸던 걸까. 내가 보는 눈이 낮은 걸까... 작품의 새로운 해석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렁이 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실망했다. 아쉬웠다. 그냥 중세시대의 이야기처럼. 오래된 옛 오페라처럼 정통 오페라로 연출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왜 굳이 현대적인 무대로 만들었을까? 낡은 배 위에서 성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어쩌자고 군함으로, 현대적인 소파와 가죽점퍼로 바꿔 놓은 것일까. 이건...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볼 수가 없잖아. 이건... 그냥 아침 아홉 시에 볼 수 있는 막장 불륜 드라마처럼 보이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다. 현대극처럼 만들면서 마법 물약은 어쩔 거야... 뭐 007 스파이들이 들고 다니는 비밀 무기이거나 웃음가스 그런 거로 생각하라는 거냐? 사랑의 묘약이 전혀 사랑의 묘약으로 느껴지지 않음에 안타까워 땅을 친다. 휴....     


그리고 

아름다운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를 다시 한번 오래도록 보자...





우리가 오페라를 보는 이유는 그 시대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 상상이 눈 앞에서 이뤄지는 모습들을 보기 위함이다. 말도 안 되는 사랑과 복수라도 오래된 시간의 흐름은 그것조차 어떤 아련한 모습으로 보게 만든다. 극에 깊이를 더하는 시간의 베일이 선사하는 환상. 그 환상에 우리는 순식간에 빠져든다. 대부분의 극들이 어차피 치정극인 것을 알지만 오래 전의 이야기는 거스를 수 없는 비극처럼 심금을 울리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극의 옷을 입자마자 비극은 사라지고 지저분한 치정극으로 보이게 되는 마법이라니. 연출 때문에 훌륭한 배우들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 않는다.(물론 나의 입장이다.) 아름다움이 일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안타까움이여... 이번에 공개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내겐 그냥 아침드라마일 뿐이었다. 도저히 몰입이 안 되겠어서 두 시간쯤 보다가 화면을 죽이고 노래만 들었다. 초연했을 때 다들 환호했을까 궁금하다. 어쨌거나 나는 오페라 문외한이니까. 나의 예술적 감각이 후진 것이라면 용서하소서... 


막 문신한 네이비씰들이 나오고..., (두 손 뒤로 묶인 톰 크루즈 끌고 나오는 거 아닌 가 불안할 정도) 독극물 통들 보이고... sf영화처럼 문 열리면 스타워즈 속 알투 디투가 나오는 거 아닌가 막... 하아.... 어쨌건 그랬다... 현대적인 해석의 신선함은 난 모르겠고 오페라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 건 분명하다. 예술을 이해 못하는 무식한 나여! (새로운 시도야 언제든 있어야 하는 게 맞는 거겠지만 그래도 바그너 지못미...)      

     

어쨌거나,

집안에만 있어야 하는 요즘 뉴욕 메트 덕에 오페라의 밤으로 하루하루를 위로할 수 있는 감사한 날들이다. 오페라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인생의 모든 맛을 음미하게 해주는 게 아닐까. 집시의 분노, 연인의 사랑, 웃음과 행복, 희망과 감사, 처절한 복수, 죽음, 연민, 고통, 질투, 무시, 회한, 절망, 파멸... 생의 모든 밝음과 어둠을 노래한다. 희극과 비극을 아름다운 선율로 절묘하게 넘나드는 예술이 바로 오페라가 아닐까.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전혀 집중이 안되어서 끄적여봤다. 앞으로 며칠 얼마나 더 아름다운 작품들이 펼쳐질까? 인간의 힘으로 어려움을 힘겹게 이겨내는 이때에 인간의 힘으로 기쁨을 전파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를 생각해본다. 우울한 마음을 함께 누리는 기쁨으로 물리치고 우리모두 힘을 내 보자.



https://www.metoper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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