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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Jul 21. 2021

내가 원한 건, 꿈을 꿀 수 있는 영혼이야

“인간은 불멸의 영혼을 가졌는데, 왜 우리는 죽으면 거품으로 사라지고 마는 거죠?”

“대신 우린 300년을 인간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축복을 받았잖아. 이곳은 웃음뿐, 불행도 눈물도 없다는 걸 너도 알잖니? 그깟 인간이 뭐가 대수라고! 이 모든 기쁨이 너의 것인데!”


인간보다 잘 사는 행운을 부여받은 인어들에게 불행이나 미움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왕국에는 웃음과 기쁨의 축제만이 넘쳐났다. 바다 밖은 고통과 불행이 가득한 곳이니 접근을 금하노라. 엄중한 법률은 그들을 지키는 파수꾼.     


불멸의 영혼이란 무엇일까? 육체가 사라지고 나서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 그것만큼 커다란 축복이 있을까? 불행과 고통, 삶의 버거움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감내할 수 있지만 모두가 비웃겠지. 손에 주어진 행복을 버리고 무엇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 나선다는 것인가. 왕국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찾아가 볼까?


미쳐버린 인어의 존재를 알고 있다. 무시무시한 마녀라고 불리는 늙고 병든 잿빛 인어. 인어만의 축복을 거부한 채 어둡고 차가운 동굴 속에 스스로를 가둔 자. 무엇 때문인지는 설이 분분하다. 인간을 만난 직후에 미쳤다는 말도 있고 애초에 미쳐서 인간을 동경하는 거라는 말도 있다. 혹시 그는 알고 있지 않을까? 인간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말이다...     



“바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멍청하구나, 네가 누리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데도?”

“알고 있어요.”

“그곳이 무서운 곳이라는 걸 알고 있니?”

“두렵지 않아요.”

“그깟 열등한 인간 따위 만나봤자 네 삶은 변하지 않아.”

“전.... 그들이 지닌 걸 갖고 싶어요.”

“그래, 지금이 딱, 인간의 삶이 궁금하고 새로운 걸 갖고 싶고, 그럴 나이이긴 하지.”

“그게 아니에요.”

“그럼, 뭐가 갖고 싶니? 반짝이는 모래를 사박사박 밟고 다니는 아름다운 두 다리를 말하는 게냐?”

“영혼이요...”

“ .... ....가거라. 귀찮고 피곤하구나..., 썩 꺼져버려!”     



아름답고 완벽한 행복의 유한함과 볼품없는 형상 속의 무한함. 불멸의 영혼을 지녔을지언정 인간은 고통과 불행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 갈 뿐이다. 그것은 왕국의 기나긴 행복과 비교되지 않는다며 인어들은 어린 인어공주를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축복을 더한다 해도 한 줌 영혼을 지닌 인간의 형상을 머릿속에서 지우진 못했죠. 인어공주는 거칠고 괴팍한 잿빛 마녀를 매일 밤 찾아갔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날 잿빛 인어는 포기하지 않는 어린 인어공주의 손을 잡기로 합니다.     


“나를 찾아왔던 인어들이 간혹 있었지만 가벼운 호기심일 뿐, 인간이 지닌 고유한 것에 대해 묻는 이는 없었단다. 왕국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자신들의 축복을 걷어찰 이유가 없었으니까. ...바보 같은 나만이 그런 생각을 했었지.”

“인어님도 저와 같았던 거예요!”

“나는... 왕국에 질병을 퍼트린다는 이유로 추방됐다. 아마도 왕은 나를 어둠 속에 가둠으로써 그 비밀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게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지만 너무 긴 시간이 흘러 버렸단다. 대신, 오랫동안 앞으로 나아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려한 굴 장식과 눈부신 화관 따윈 잊어버려라! 쓸모없고 무겁기만 하지. 그따위 것들은 네가 생각하지 못하도록 현혹하는 것일 뿐이야.”

“그럴게요.”

“어린 인어공주야..., 네가 땅 위로 간다고 해도 원하는 걸 쉽게 얻을 순 없을 게다. 크나큰 어려움이 따를 거야. 하지만 그게 어떤 건진 아무도 알 수 없어.”

“명심할게요. 인어님.”

“받아라.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던 약이란다. 지느러미가 타들어가는 고통을 감내한다면 너는 인간의 다리를 얻게 될 게다. 하지만 그건 겨우 첫 번째 문일 뿐이다. 얼마나 많은 고통과 슬픔의 문들이 그 뒤에 있을지는 나조차도 모른단다.”

“슬픔과 고통의 문 말고도 다른 문이 있을지도 모르죠? 인어님도 저랑 같이 가요!”

“아니, 나는 여기 있으련다. 너 같은 아이가 또 올 수도 있잖니. 한때는 나도 저 위로 올라가는 꿈을 수도 없이 꾸었지만 이제 내 길을 만들었으니 후회는 없다. 너 같은 아이를 돕는 일 말이다. 정신 나간 마녀로 매도되는 일쯤은 내가 하마.”

“그래도...”

“... 너는 이제 새로운 길을 만들게 될 거야. 나는 이곳에서 네 뒤에 올 용감한 다른 인어들을 안내해야지. 네가 먼저 갔으니 발자국을 잘 따라가라고 말해 줄 테다. 자, 이제 가서 인간만이 지닌 무한한 영혼에 대해 알아내려무나. 그리고 네 것을 찾아.”

“인어님...”

“훗날, 바닷속 모든 존재들에게 영혼의 비밀을 알려주려무나. 처음, 왜 그들은 이 왕국의 완벽한 축복을 거부한 채 땅 위로 올라가 인간이 되었는지를 말이다. 완전한 행복을 버리고 불완전한 생명의 불씨를 감내하면서까지 얻게 된 각자의 영혼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 나도 궁금하구나....”     




잿빛 인어의 말은 충격이었습니다. 두 발로 걷고 있는 물 밖의 사람들도 사실 처음엔 모두가 인어였다는 놀라운 비밀을 인어공주에게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어린 인어공주는 그가 건네 준 보랏빛 약병을 손에 꼭 쥐고 수면 위로 향했습니다.


‘불멸의 영혼... 내 고유의 것을 찾을 거야.’

잿빛 인어는 인간만이 '꿈'이란 것을 꾼다고 했습니다. 문득, 원하는 모든 걸 가질 수 있고 매일매일 행복한 왕국의 인어들은 ‘꿈’이라는 걸 꾸진 않는다는 것을 어린 인어공주는 깨닫게 됐어요. 인어공주는 ‘꿈’이라는 말이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했죠. 잿빛 인어는 자신이 꿈을 꾸었다는 죄로 왕국 밖으로 쫓겨났다고 했습니다.


'꿈? 내가 궁금해 하고 끝없이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도 혹시 '꿈'이라는 것과 관련 있는 것일까?' 어린 인어공주는 천천히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헤엄쳤어요. 수면 위로 아른거리는 태양의 환한 움직임이 유독 아름다워 보입니다. '나는 지금 다른 세상으로 향하고 있어. 저기 하늘 위에 이글거리는 태양도 반짝이는 별도 인간 세상 너머의 또 다른 세상이야. 그럼, 인간도 나처럼 다른 곳을 떠올리기도 하는 걸까?' 


깊은 생각에 빠진 채 부드럽고 날렵하게 이리저리 물살을 휘감던 어린 인어공주는 잿빛 인어가 말하던 '꿈'을 꾸며 힘껏 수면 위로 솟구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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