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사거리에서 철산역 쪽으로 한참을 걷다 보면 중간에 높은 고개가 하나 있다. 열심히 걸어 올라가 정점에 도달하면 허름한 가게들이 몇 개 늘어서 있는데 내가 자주 가던 중고 서점은 고개의 꼭대기, 정중앙에 자리했다. 드르륵,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래된 책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곰팡내.
처음 그곳을 찾았던 건 내 책꽂이 틈새마다 더 이상 책을 쑤셔 넣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덜 재미있거나, 덜 중요하거나, 가치가 덜한 책을 골라 처분해야 했다. 백팩 가득 책을 넣고 땀을 뚝뚝 흘리며 들어선 곳엔 중년 여자가 있었다. 무뚝뚝한 얼굴이었고 손님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괜히 무안해진 나는 어색함을 견디다 못해 얼결에 발랄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여자는 네. 한마디뿐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하루 이틀 조금씩 책을 내다 파는 재미가 쏠쏠했다. 칠백 원, 천 원씩 책을 팔고 받은 돈으로 나는 그곳에서 다시 책을 구입했다. 생각보다 좋은 책이 많진 않았지만 한참을 고르는 동안에 원하던 책이나 작가를 발견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내가 탄성을 지르거나 감탄하며 기쁨을 표현하는 순간에도 여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했다.
일주 일 뒤 여느 때처럼 집에서 책을 골라 서점에 건네고 다시 재밌는 책이 뭐가 있을까 고르고 있는데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 주인 여자와 나와 손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각자의 일을 했다. 손님이 책장에서 이것저것 책을 뒤적이는 모습을 얼핏 보다가 그의 손이 페터 회의 책위로 어른 거리는 걸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거 재밌는데 그거 집어!’ 한참 동안 이것저것 고르던 손님이 마지막에 마루야마 겐지의 <밤의 기별>과 페터 회의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을 들고 가는 걸 보며 응원하는 기분이 들어 홀로 불끈 주먹을 쥐었다.
그 뒤로 나는 그곳을 갈 때마다 다른 손님이 고르는 책을 염탐하는 버릇이 생겼다.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하고 속으로 참견하며 온갖 잔소리를 해댔다. 그거 아니야, 내려놓고 척 팔라닉의 <질식> 그거 들어. 아니 말고 밑에서 두 번째 거! 어느 날은 내 또래의 여자가 아모스 오즈의 <나의 미카엘>을 손에 들고 고민하는 걸보며 속으로 애가 타게 사라고 외치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래 그거야! 좋은 선택을 한 거야! 그거 안 사면 후회한다! 하지만 여자는 끝내 다른 책을 골랐고 나는 속으로 절규해야 했다.
내 간절한 외침이 잘 통하지 않는다고 느낀 어느 날은 계획을 변경했다.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과 유명 작가들의 단편 모음집인 <견딜 수 없는 미쳐버리고 싶은>, 그리고 존 버거의 책을 서점에서 찾은 나는 아줌마 모르게 손님이 잘 볼 수 있도록 책을 반쯤 뽑아 놓았다. 그런 내 호객행위에 누군가는 관심을 보이다가 걸려들었고, 누군가는 튀어나온 책이 불편한 듯 다시 제자리로 꾹 눌러 집어넣었다. 그 작은 중고서점을 오갈 때마다 나는 책 판매의 환희와 절망을 온몸으로 느끼곤 했다.
그런 날들은 자주 있었다. 내 작전에 걸린 이름 모를 손님이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나, 마르케스의 <꿈을 빌려드립니다>를 들고 서점을 나섰을 때는 스스로에게 너무도 뿌듯해져서 주인 여자를 보며 내가 얼마나 책을 잘 팔고 있는 지를 어필하듯 고개를 치켜들기도 했다. 물론 우리 사이엔 아무 말도 없이 말이다.
또 한 번은 책을 둘러보다가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워터멜론 슈가에서>를 발견했다. 그것도 두 권을! 나는 괜히 마음이 급해지고 어쩐지 그건 아무에게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누가 볼세라 얼른 두 권을 집어 들었다. 주인 여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두 권 맞냐고 물었다. 머쓱해진 기분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선물할 거라고 말했지만 거짓말이었다. 그냥... 남 주기가 싫었다. 다섯 권을 찾았다면 다섯 권을 샀을 거다. 누구도 못 갖게 내가 다 쓸어올 테다! 그런 마음. 여전히 그 책은 멋진 금색 초판본으로 내 책장에 두 권이 나란히 꽂혀 있다.
얼마간 홀로 책을 골라주는 일에 재미를 붙이자 이런 서점을 열어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뚝뚝한 주인 여자와 함께 작은 중고서점을 북적이는 곳으로 만드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파리의 유명한 서점 [셰익스피어 & 컴퍼니]의 주인인 실비아와 그의 친구 아드리엔느가 되는 거다.
새로운 회사에 들어가 적응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언덕 위의 중고서점을 잊고 지냈다. 그곳에 발길을 끊은 지가 언제인지도 모를 만큼 오래... 불현듯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싶어 쉬는 날을 골라 언덕을 올랐다. 슬프게도 서점은 문이 닫혀 있었다. 유리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들여다봤지만 어두운 내부만 보일뿐 주인 여자는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흐르고 나는 또 그곳을 잊었다.
어디선가 그 주위로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소리가 들렸고 근처를 지날 일이 있어서 다시 한번 언덕을 올라가 보았다. 혹시나 기대하는 마음이었지만 서점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곳엔 음식점이 들어와 있었고 주인 여자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터벅터벅 언덕을 내려오는데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작은 슬픔이 밀려왔다. 좋은 추억이 있던 곳, 한 때 소중했던 장소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자 내 기억의 한 부분이 무참히 뜯겨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작은 기대나 희망 같은 것들이 느껴지던 곳을 불도저로 밀어버린 뒤의 황량한 공터에 서 있는 마음이랄까. 찝찝하고 온전치 못한 감정의 기복이 그 후로 며칠 동안 이어졌다.
나중에 브라이어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에게 파리의 거리는 오데옹 가 하나뿐이었다. 내 느낌일 뿐이겠지만, 나는 언제나 오데옹 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생각했다. 오데옹 가는 바로 실비아와 아드리엔느, 그리고 내가 그들의 책방에서 보낸 행복한 시간이었다.'
-<파리는 여자였다> 안드레아 와이스-
그 언덕길을 동네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당시 무료했던 나에게는 가장 즐거운 길이었다. 가끔, 그 허름했던 중고서점을 [셰익스피어 & 컴퍼니]처럼 전 세계 작가들이 찾아오는 장소로 만드는 상상을 했다. 유명 작가가 되는 게 아니라 작가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서점을 만들면 어떨까. <파리는 여자였다>를 읽다가 아드리엔느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그때의 무뚝뚝한 주인 여자를 떠올린다. [셰익스피어 & 컴퍼니]를 운영한 실비아와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아드리엔느. 말 한마디 없이 재고를 체크하고 있던 여자와 속으로만 주절주절 책을 팔기 위해 애썼던 내가 아드리엔느와 실비아처럼 생각되어 웃음이 났다. 언젠가 파리를 가면 꼭 한번 세느강 옆 [셰익스피어 & 컴퍼니]에 가봐야지. 영화 [비포 선 셋] 이후로 관광객이 더욱 많아졌다고 하던데 나는 언제쯤 그곳에 가볼 수 있을까?
카운터에서 금전등록기가 울리기 시작하면 이런저런 고객의 비밀이 까발려진다. 이것들은 고객이 읽어보기 위해서, 아니면 그냥 쌓아둘 요량으로, 그도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주려고 집으로 가져갈 책이다. 책은 어떻게든 그 사람의 삶을 넌지시 이야기해준다....(중략)... 그건 얼마쯤은 다른 사람의 가슴속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것과도 비슷하다.
- <노란 불빛의 서점> 루이스 버즈비-
책은 그 사람의 삶을 보여준다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 나의 책장 속 책들을 보는 사람은 나의 모든 것을 알아차리겠구나. 커트 보네거트와 루쉰, 고전 문학들로 뭔가 있어 보이는 사람인 척 꾸며놓았지만 책장 한쪽에는 이토 준지의 기괴한 만화책들이 숨겨져 있다. 맨 아래칸엔 좋아하는 그림책들도 가득하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북 시리즈도 보인다. 게다가 가만 보니 아직 읽지 않은 깨끗한 새책들도 수두룩. 루이스 버즈비의 말이 맞는지 한걸음 떨어져 내 책장을 바라본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를 책장 맨 위부터 아래까지 눈으로 훑어 내리며 더듬어본다. 음... 멀찍이 떨어져서 보니 이제 알겠다. 별 볼 일 없는 자신을 감추고자 괜히 있어 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과 허세와 허영이 곳곳에 드글드글하다.
동네 중고서점_ 2015년 가을 사라짐.
1998년 ~ 2005년까지 심심하면 다니던 중고서점.
2016년 즈음, 재개발 소식에 다시 가보니 벌써 음식점으로 바뀜.
목록_
01. 프롤로그_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방식
02. 서점_ 주인 모르게 홀로 팔아버린 책들
03. 리본_ 범인을 잡기 위해 놓은 덫에 걸린 나
04. 브래지어_ 입었을까 안 입었을까?
05. 미미_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인가
06. S_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07. M_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어
08. 아빠_ 간신히 되찾았으나 기어코 잃어버렸다.
09. 분노_ 감정의 잔해더미에서 살아남기
10. 개그감_ 나이가 들면 웃을 일도 사라지고
11. 머리숱_ 자연스럽다기엔 좀 억울하다
12. 성질머리_ 고약한 성질머리도 아이 앞에선 길을 잃네
13. 나이_ 나? 마흔!
14. 사탕_ 슈퍼집 딸이 구멍가게에서 사탕을 훔쳤대
15. 골목_ 나는 여덟 개의 다리로 빠르게 달리지
16. 에필로그_ 잃어버려서 잊어버린 걸까, 잊어버려서 잃어버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