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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Sep 14. 2022

리본_ 범인을 잡기 위해 놓은 덫에 걸린 나

슬리퍼를 쥔 손에 힘을 주고 지켜본다. 걸려라. 이번에 걸리면 진짜 주둥이가 얼얼할 정도로 힘껏 때려버릴 거다. 10분째 나는 몸을 숨기고 떡배를 노려본다. 묶여있는 떡배 옆에 작은 리본이 달린 구두 한 짝을 가져다 놓았다. 물어. 어서 물어뜯어.


맨날 언니 것만 물려 신다가 2년 만에 새로 받은 구두였다. 체육이 없는 날에만 아껴 신고 다녔는데, 특히나 옆에 달린 손톱만큼 작은 빨간 리본이 예쁘다며 친구들이 부러워했던 구두였다. 하필, 그 리본 하나가 없어졌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완전히 잃어버렸다. 분명 떡배다. 녀석이 범인이 아닐 거라는 가능성은 단 한 톨도 없다. 맨날 시끄럽게 짖고 지난번엔 언니 실내화를 물어뜯었지. 사고만 치는 녀석 때문에 짜증이 날대로 났었는데. 좋아 이번에 걸려라. 진짜 뜨거운 슬리퍼 맛을 알게 해 주마.


하지만 떡배는 내 구두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다음날 엄마가 떡배를 슈퍼에 묶어 두길래 조용히 뒤를 따랐다. 오늘은 잡는다. 나는 슬쩍 녀석 옆에 다시 한번 신발을 밀어 넣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지켜본다. 이번엔 슬리퍼 대신 30센티 자를 들고 왔다. 이상하다. 10분, 20분이 지나도 떡배는 구두에 입을 대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나는 좀 더 녀석을 지켜본다.


그때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떡배 앞을 지나간다. 머리에 핀을 꼽고 예쁜 목줄을 한 채 주인과 지나가는 강아지를 떡배가 바라본다. 치, 개도 이쁜 건 아나 보지? 이제 그만 리본이나 뜯어라. 내 바람과는 달리 떡배는 강아지가 지나가자 털썩 바닥에 엎드린다. 뭐하냐. 멍청한 개 녀석. 속이 터지고 짜증이 난다. 이번엔 동네 꼬마들이 땅바닥에 분필로 낙서를 하며 노는 모습을 눈동자만 굴리며 구경하고 있다. 아이들이 일어나 뛰어다니자 떡배가 벌떡 일어나 꼬리를 흔들어 댄다. 애들이랑 놀고 싶나? 음... 조금 불쌍하다고 느끼는 순간 리본 생각에 성질이 나서 떡배 앞에 불쑥 나선다. 신발을 들어 아예 떡배 입에 갖다 댄다. "자 물어. 안 해? 너 맞잖아! 물으라니까!" 떡배는 고개를 돌린다. 에이씨, 진짜 열받게 하네.


기분이 완전히 나빠진 채로 주섬주섬 자와 구두 한 짝을 들고 집으로 가는 길에 동네 약국에 들렀다. 감시하느라 쪼그리고 있었더니 다리가 아팠다. 안녕하세요. 현우 오빠 왔어요? 아줌마는 아직 안 왔다며 왜 신발을 들고 다니냐고 놀라며 물었다. 대답하려는데 막 약을 사러 들어온 사람이 있어서 그만두었다. 아줌마가 준 비타민 사탕을 빨아먹으며 의자에 앉아 창문 너머로 떡배를 보았다. 나쁜 놈. 눈치는 빨라가지고.


아이들이 사라지자 떡배는 몸을 틀어 엉덩이를 뒤로 빼더니 줄을 당겼다. 낑낑거리며 자꾸만 자꾸만 몸을 줄에서 멀리했다. 목이 너무 아플 것 같은데도 떡배는 멈추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줄을 끊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한 번도 그런 행동은 한 적이 없었다. 아니다. 어쩌면 내가 보지 못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떡배를 계속 바라보았다. 녀석은 포기한 듯 다시 엎드려 지나가는 사람들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일어나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도 했고, 다시 줄을 당기다가 멍하니 사람들을 보더니 철퍼덕 엎드리는 걸 여러 번 반복했다.


표정이 왜 그러냐고 묻는 약국 아줌마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나도 내가 왜 그런지 잘 모르겠어서 그냥 인사만 하고 나왔다. 그날 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자꾸만 떡배가 생각났다. 앞을 지나는 개들을 바라보던 표정이며, 아이들에게 꼬리를 흔들던 모습, 줄을 끊으려고 애쓰는 것 같은 행동과 빙빙 돌고 낑낑거리거나 우울한 표정으로 엎드려 있던 모습들. 생각해보니 떡배는 한 번도 묶인 줄에서 풀려난 적이 없었다. 실컷 뛰어다닌 적도 없었다. 늘 좁은 마당이거나, 슈퍼 앞에만 묶여 있을 뿐이었다. 이상한 생각들이 자꾸만 이어져 결국 늦잠을 자는 바람에 나는 아침도 먹지 못하고 뛰어서 학교를 가야 했다.


학교에 다녀온 나는 떡배에게 달려가 줄을 풀었다. 떡배 생각만 하느라 수업시간에 뭘 배웠는지 기억도 안 났다. 쇠로 만든 줄이 덜그럭 거리며 풀리는 걸 보던 떡배가 껑충껑충 뛰어올랐다. 나는 가만있으라고 머리를 탁 때렸다. 아빠가 집에서 슈퍼로 데려갈 때 목줄을 풀면 똑같이 껑충거렸다. 하지만 100미터도 못 가서 다시 슈퍼 앞에 묶어 놓았을 텐데 그때 떡배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니까 갑자기 코가 찡했다. 정신없이 자꾸만 펄떡 거리는 떡배 머리 통을 다시 한번 콩 때리고 떡배와 함께 슈퍼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날 이후로 떡배와 나는 매일매일 하루 30분 동네를 돌았다. 동네 곳곳의 골목을 구경시켜주고 넓은 길이 나오면 함께 뛰었다. 그러다 친구들을 만나면 같이 다녔고, 어느 날은 떡배의 힘이 너무 세서 내가 끌려다닌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목줄을 확 낚아채고 성질을 내며 내가 앞으로 나간다. 내가 주인이야 인마. 까불지 마. 나는 눈썹을 추켜올리며 거들먹거린다. 착한 떡배는 꼬리가 빠질 정도로 흔들며 나를 따른다.


숙제를 하느라 산책을 가지 못한 날엔 어김없이 문 밖에서 나를 부르는 떡배 목소리가 들린다. 왈왈. 왈왈. 도저히 산수문제의 정답을 모르겠는 날은 점점 시간이 지체되고, 마음이 급해진 나는 감시하는 오빠를 향해 혹은 언니를 향해 왈왈. 왈왈. 짖는다. 한심하다는 듯 언니가 말한다. "범인 잡겠다고 난리 더니 떡배가 널 잡은 거 아니냐? 쯧쯧, 넌 머리가 떡배보다 나쁜 것 같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왈왈 댄다. 그럼 일단은 꼴 보기 싫으니 빨리 다녀오라는 허락이 떨어지니까. 왜 저래, 제정신이 아니야. 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떡배와 나는 왈왈, 왈왈, 함께 짖어대며 문을 나선다.


작은 리본은 분명 떡배 짓일 거다. 그렇게 생각한다. 꿀꺽 삼켜 증거를 완벽히 없애버렸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내가 진짜 잃어버린 게 뭔지 알게 됐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리본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나는 떡배를 관찰할 일도 없었을 거고 그러면 떡배는 계속 그 자리에 묶인 채, 평생 산책 한번 못해 보고 살았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똑똑한 떡배. 정말 언니 말대로 나보다 떡배 머리가 훨씬 좋은 것 같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이아손의 이야기가 있다.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멀리 도망갔던 이아손은 훗날 자신의 나라를 되찾기 위해 길을 나선다. 길을 걷던 중 할머니로 변신한 헤라를 업어 강을 건네주다가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올코스에는 오래전부터 모노산달로스가 내려와 이올코스의 왕이 된다는 소문이 있었고, 이아손은 자신이 예언을 실현할 모노산달로스(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자)라는 걸 알게 된다. 작가 이윤기는 이아손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잃어버렸던 가죽 신발을 신고 온 테세우스, 달마대사의 무덤 속에 남아있던 신발 한 짝, 신데렐라의 구두 한 짝, 콩쥐의 꽃신 한 짝, 이 모두가 모노산달로스라고 말한다. 여기에 내 구두 한 짝도 추가해야겠다.(내 것은 엄밀히 말해 구두에 달린 리본이지만)     


우리의 신발은 온전한가우리는 혹시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잃어버리고도 잃은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잃어버린 신발을 찾아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닌가

 -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집요하게 내 신발 한 짝을 찾아 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떠났던 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말할 수 있겠다.


검은색 구두에 달린 리본_

19**년 12살 5학년 봄에 생긴 구두, 일주일 뒤 구두에 달린 작은 리본이 사라졌다.
한 달 뒤 나머지 리본마저 내 손으로 뜯어 리본 없는 구두로 신고 다녔다.



목록_     

01. 프롤로그_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방식

02. 서점_ 주인 모르게 홀로 팔아버린 책들

03. 리본_ 범인을 잡기 위해 놓은 덫에 걸린 나

04. 브래지어_ 입었을까 안 입었을까?

05. 미미_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인가

06. S_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07. M_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어

08. 아빠_ 간신히 되찾았으나 기어코 잃어버렸다.

09. 분노_ 감정의 잔해더미에서 살아남기

10. 개그감_ 나이가 들면 웃을 일도 사라지고

11. 머리숱_ 자연스럽다기엔 좀 억울하다

12. 에필로그_ 잃어버려서 잊어버린 걸까, 잊어버려서 잃어버린 걸까?

이전 02화 서점_ 주인 모르게 홀로 팔아버린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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