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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Sep 24. 2022

브래지어_ 입었을까 안 입었을까?

결혼을 하고 나자 친구들과 만나는 횟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함께 휴가 날짜를 맞추는 건 더욱 힘들어지던 날들이었다. 몇 번의 약속을 미루다가 겨우 날짜를 맞춰 급하게 여행을 떠났다. 부산에 도착해 돼지국밥을 한 그릇 마시고 숙소에서 잠시 쉬다가 광안리로 향했다. 아름다운 밤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화려한 광안대교를 보고 있자 학생 때의 우리들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모두가 들떠 환호했다. 신선한 모듬회에 소주까지 깔끔히 마시고 숙소로 돌아와 씻으려고 보니 속옷 가방이 없네? 분명히 작은 파우치 안에 넣어서 따로 뒀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기차에서 말고는 가방을 연 적이 없으니 아마도 간식을 정신없이 꺼내다 떨어뜨렸던 것 같다. 내가 그렇지 뭐.


오히려 잘됐다. 이 기회에 새 걸로 하나 사자 싶어 J와 숙소 근처 마트로 향했다. 매번 똑같은 걸 집는 나에게 J는 요즘 누가 와이어 있는 걸 입냐며 속옷을 하나 골라주었다. 브래이지어라면 당연히 가슴을 받쳐 줄 와이어가 있어야 되는 거 아냐? J는 놀라지나 말라며 일단 입어보라고 했다. 숙소에서 속옷을 갈아입은 나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런 신세계라니! 와이어로 처진 가슴을 간신히 받치고 있어야 그나마 가슴이 아, 거기 있구나~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와이어 따윈 없어도 되는 것이었다니. 맨날 소화불량에 숨쉬기도 힘들어 브라 앞쪽을 살짝 들어 숨을 몰아쉬기도 했던 불쾌하고 답답했던 날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듯했다.     

 

친구들 앞에서 속옷 차림으로 기쁨에 흥분한 내가 입고 왔던 브래지어 솔기를 뜯어 와이어를 쭈욱 뽑아내자 친구들이 난리가 났다. “야! 그렇다고 그걸 뽑냐!” “너 어릴 때 언니 미술대회 나갈 작품에 그림 그려서 난리 난 적도 있었잖아? 아무튼 뭐 박살 내는 데는 일가견이 있단 말이지.” 칭찬 아닌 칭찬을 들으며 나머지 한쪽의 와이어도 쭈욱- 뽑아 흔들었다. 단단한 와이어를 제거하고 나니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까짓 받칠 것도 별로 없는데 내가 왜 그동안 이딴 거추장스러운 쇠 쪼가리를 족쇄처럼 차고 있었냔 말이지.   


세탁을 자주 하면 와이어 끝부분의 천이 닳아 작은 구멍이 뚫릴 때가 있다. 그럼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 가슴 한쪽이 따끔거리는 거다. 화장실로 달려가 보면 구멍으로 와이어가 살짝 삐져나와 가슴을 찌르던 일도 있었지. 가슴 끝이 벌겋게 상처가 난 상태로 일을 해야 했다. 튀어나오면 다시 누르고 또 누르고, 퇴근할 때까지 와이어를 밀어 넣으며 사투를 벌였다. 일에 집중할 수도 없고 그날 하루는 불편했던 기억만 난다. 그냥 뽑아 버리면 될 것을 그땐 왜 그걸 몰랐나 몰라.     


그날의 여행으로 노 와이어의 기쁨에 도취된 나는 내친김에 노브라에 도전했다. 근데 또 완전 노브라를 하기엔 용기가 살짝 없어. 일단 이런저런 니플 패치를 주문했다. 더운 여름이었나? 꽃모양 실리콘 패치를 붙이고 원피스를 입은 자유로운 몸으로 재활용을 버리다가 망신을 당할 뻔했다. 땀이 흐르다 보니 분홍 실리콘 패치의 끈기가 약해졌는지 치마 아래로 뭐가 툭 떨어지는 거다. 응? 땅바닥에 분홍꽃이 피었네? 금방 봤으니 망정이지 어찌나 놀랐던지 주위를 둘러볼 새도 없이 허겁지겁 주워 들고 집으로 달렸다. 그 뒤로 실리콘은 아웃, 테이프로 된 패치만 사서 붙이고 있는데 어느 날 똑 떨어진 게 아닌가. 어쩔 수없이 잠깐만 붙이자 싶어 의료용 종이테이프를 잘라 붙였다. 깨지 말고 누워서 잘 자라고 아주 꽉꽉 눌러서.     


헌데 그날따라 몸이 슬슬 아픈 게 몸살의 징조가 보였다. 잠깐 누웠다 일어나니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온몸이 욱신거려 간신히 병원을 다녀와 쓰러져 잠이 들었다. 나는 잊고 있었지만...., 그 종이테이프를 가슴에 붙이고 꼼짝없이 3일간 누워 앓았다. 작가 다이앤 애커먼이 <감각의 박물학>에 이런 글을 남겼다. '감촉이 지루하게 이어지면 사라질 수 있다'고. 그의 말은 진짜였다. '지속적인 압력은 처음에는 촉각 수용기를 자극하지만, 나중에는 멈춰버린다'는 그의 말을 나는 그때 완벽히 체득했다.


4일째 되는 날 정신이 들었고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가 느껴져 샤워하러 들어가 옷을 벗었더니 이상하다... 있어야 될게 안 보이네? 어? 테이프. 아주 잠깐 동공 지진과 동시에 불길함을 느꼈다. 손톱으로 살살 끝부분의 감을 보니 이건 망했다는 걸 알겠다. 감촉이 멈춰버리고 사라지자 그냥 살이 되어 버렸다는 걸 알겠다. 갑자기 몸살기가 느껴지지 않고 정신이 퍼뜩 차려졌다. 내 살과 완전히 하나가 된 테이프를(아니 살을) 내 손으로 뜯으려면 정신을 차려야지 별수 있나.


꿀꺽 침을 삼키고 테이프를 뜯던 나는 지옥을 맛봤다. 3일을 아프면서도 울지 않았는데 찔끔 눈물이 났다. 니플패치의 가운데가 왜 접착되지 않는지 이제 알았다. 브라질리언 왁싱 따윈 명함도 못 내민다. 진짜로 피부가 살짝 뜯겨지네? 이거 뭐 잘못 봤나? 막 빨갛고 피나기 직전이야. 한쪽의 지옥을 맛보고 나니 공포가 더욱 커졌다. 하자. 할 거면 해버리자 결심한 나는 한 번에 뜯기로 마음먹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테이프로 꽁꽁 묶어 논 과거의 나에게 실망했다. 풀어주기가 너무 무서워. 아니야 가자. 좋아 간다. 한 번에 풀어준다. 죽지만 마라.   


욕실을 기어 나오며 “후시딘!”을 외치는 나를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보던 가족들. 그날 이후로 노브라는 접었다. 하지만 한번 자유에 눈을 뜬 나는 인터넷을 뒤져 노 와이어에 후크도 없고 솔기도 없는 심리스를 찾아냈다. 내 치수에 딱 맞는 걸 샀더니 두치수는 아래인 것 같은 모양새로 오길래 아예 두치수 크게 사서 딸려 온 캡도 빼버리고 나시처럼 편하게 입는다. 덕분에 더는 소화불량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숨쉬기 불편한 답답함을 느끼지 않아 감사하다.



건강이나 아름다움을 위해 견뎌내는 고통도 있다. 여자들이 다리에 밀랍을 바르는 것은 예로부터 전해지는 유행이다. 나도 최근에 맨해튼의 어느 미용실에서 다리에 밀랍을 발랐는데 그 고통은 만 마리의 벌이 동시에 쏘는 것처럼 지독했다....(중략)... 고통이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름다워지기 위해 고통을 견딘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희생의 모습을 띤다.      

-<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애커먼-     


빨래를 정리하다가 와이어가 들어있던 브래지어가 떠올랐다. ‘우리는 거의 항상 자신을 의식하고 있지만 몸은 자주 의식하지 않는데, 그렇지 않으면 감각의 태풍 속에서 극도의 피로를 느낄 것’이라고 말한 다이앤 애커먼의 말처럼, 의식하지 않던 내 몸이 와이어의 거추장스러움을 의식한 순간 감각의 태풍 안에 있는 듯 괴로움과 불편함을 알아 차렸다. 그 태풍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나자 와이어 브라라는 그럴 듯 해 보이는 영문 이름의 철사 쪼가리가 내 가슴을 받치고 있다는 감각을 견디는 것이 너무도 끔찍한 고통으로 다가왔다. 등에 박히는 느낌의 후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나는 답답한 브래지어를 벗어버렸다.   


지금은 똑똑한 친구들이 와이어 브라의 불편함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오랜 습관 때문인지 나는 가슴이 처지지 않도록 와이어브라를 하는 게 필수라고 생각했다. 자신감을 살려주고 가슴을 쫀쫀하게 잡아준다는 광고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가. 노 와이어 브라가 나온 걸 알고 있었지만 늘 사던걸 사곤 했는데 친구 J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소화불량의 이유도 모른 채 소화제만 삼켜댔을 것이다.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무뎌진 감각 속에서 몇십 년을 아무렇지도 않게 고통받고 있었다. 자신감과 아름다움, 그리고 자기만족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져 소비되어 왔지만 고통받는 가슴에게 따로 입장을 물어본 적 없잖아. 그래서 나는 옥죄던 가슴을 그만 놓아주기로 했던 것이다. 잘 가라 와이어. 나의 자신감과 아름다움은 이제 다른 곳에서 찾으마.      


브래지어_ 2017년 친구들과의 여행에서 잃어버림

잃어버린 브래지어 덕분에 와이어 없는 브라를 알게 됐다.
그 후, 편안함을 추구하다가 노브라까지 갔지만 겉 옷에 쓸리는 불편함 때문에 포기했다.
지금은 와이어는 물론 후크와 봉제선까지 없는 넉넉한 심리스로 편하게 생활중이다.



목록_     

01. 프롤로그_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방식

02. 서점_ 주인 모르게 홀로 팔아버린 책들

03. 리본_ 범인을 잡기 위해 놓은 덫에 걸린 나

04. 브래지어_ 입었을까 안 입었을까?

05. 미미_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인가

06. S_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07. M_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어

08. 아빠_ 간신히 되찾았으나 기어코 잃어버렸다.

09. 분노_ 감정의 잔해더미에서 살아남기

10. 개그감_ 나이가 들면 웃을 일도 사라지고

11. 머리숱_ 자연스럽다기엔 좀 억울하다

12. 에필로그_ 잃어버려서 잊어버린 걸까, 잊어버려서 잃어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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