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당신은 지금 8차선의 건널목 앞에 서 있다. 그리고 막, 건널목 중간에 검은 형체의 무언가를 얼핏 보았다고 하자. 시신경이 그것을 감지하자마자 당신의 뇌는 그것이 동물의 사체 일지도 모른다는 신호를 맹렬히 보낸다. 당신은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빨간 불은 영원처럼 멈춰있고 차들은 빠르게 내달린다. 그 덕에 가운데에 놓여 있는 작고 검은 물체가 조금씩 움찔거리는 게 보여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우리는 어떤 알지 못할 두려움으로 그곳에 신경은 쓰되 정확한 시선을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 그것은 죽은 동물이라는 데 점점 무게가 실린다.
드디어 신호가 바뀐다. 길을 건너며 당신의 마음속에선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하는 마음과 동시에 그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도 함께 들끓는다. 거의 가까워졌을 때 불안하고 다급한 마음에 대충 그 언저리 어디쯤엔가 시선을 던지고 만다. 그리고 그 옆을 스쳐가는 동시에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눈을 돌리지만 여전히 시선은 명확하게 박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당신은 모든 것을 봤다고 판단하게 되고 그것은 당신의 머릿속에서 동물의 사체로 완전히 확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다른 한 사람.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을 다잡은 채 똑바로 그것을 마주 보며 걸어온 사람은 그것이 실은 동물의 사체가 아니라 헝겊조각이거나 검은 비닐봉지였음을 확인한다. 그러자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두려움과 불안함은 깨끗이 사라진다. 쓸어내리는 안도감으로 건널목을 건너고 나면 실체를 확인한 자의 마음속에는 불편했던 그것의 존재는 완전히 존재를 감춘다. 이윽고 건널목을 지나 모퉁이를 돌면 자신의 기억에서 그것은 이미 먼지처럼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두려움에 언뜻 보았던 행위를 마치 자신이 그것을 직시한 것이라 믿어버린 자의 마음속에는 건널목을 건너는 동안에도, 먼 모퉁이를 돌아 어딘가로 향하는 동안에도 그것은 내내 가슴과 머릿속에 찜찜한 동물의 사체로 남게 된다.
실체를 대한다는 것은 이와 같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들에 대하여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일까. 일상생활을 하며 누군가를 만나는 순간순간 우리는 흘깃 보고 들은 것들로 혹은 명확하지 않은 행위와 말들로 인하여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일들이 허다하다. 그저 그렇겠거니. 저 사람은 아니겠거니. 으레 그런 이유겠거니. 하고 지레짐작해버리고 마는 날들. 상황들. 마음들.
중요한 것은 실체를 마주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것을 그대로 믿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제대로 보고 만지기 전에는 판단이라는 것을 보류해야 한다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만 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많다. 그 사람에 대한 의리, 배려, 사랑 따위의 이름으로 직접 판단해야 할 실체를 가리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한동안의 사랑과 한동안의 평온함과 한동안의 좋은 관계를 유지해 줄 뿐. 언젠가 베일이 벗겨지는 날 상처를 받게 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실체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너무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어쩌면,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감정은 그토록 무겁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일 수 도 있다. 도스또예프스키의 글을 읽다보니, 우리는 감정의 실체가 아닌 그에 대한 공포 속의 ‘고통’에 집착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도스또예프스키의 <악령>에는 이러한 글이 나온다.
"집채만큼 커다란, 그렇게 커다란 바윗돌을 생각해 보세요. 그 돌이 매달려 있고 당신은 그 밑에 있습니다...(중략)... 모든 사람들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할 겁니다....(중략)... 돌 자체에는 고통이 없지만 돌에서 비롯된 공포 속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의 실체를 제대로 마주한다면 그것은 그동안의 내 생각과는 조금쯤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실은 그것이 당신에게 좋은 것일 수도, 혹은 더 나쁜 것일 수도 있다. 겁이 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오롯이 문제를 직시하는 순간 어쩌면 그것은 가볍게 벗어 버릴 수 있는 것. 걱정하던 것처럼 무거운 것이 아닌, 생각보다 쉽게 해결 할 수 있거나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 있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내가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신경 써야 하는 일인 것 같다. 어른이 됐지만 아직도 성장하지 못한 나는 처음처럼 늘 우왕좌왕이다. 나는 언제쯤 어른스러워질 수 있을까. 내 얘기를 하자면 이것은 무언가를 직시했으니 좋은 것일까. 무언가를 잃었으니 나쁜 것일까. 잘 모르겠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정리가 잘 되지 않아 불안하고 나 같은 사람이 어쩌면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자 끄적여 보는 중일 뿐이다.
나는 이제야 도스또예프스키가 말한 바위와 바위에서 비롯된 공포를 깨닫고 잃어버린 관계의 이면을 마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글프고 마음이 아파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S는 몇 안 되는 내 소중한 인연이었다. 십 년이 못 되는 시간을 함께 했으니 짧으면 짧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친구로 만난 사이가 아닌 상태에서도 서로에게 많은 애정을 쏟았으니 좋은 인연이 맞았다. 상대적인 인간관계에서 서운한 감정을 갖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느 상황이든 각자의 입장이라는 게 있으니 누구라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작은 감정들을 느끼면서도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오해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S는 서운함을 운운했지만 서운함과 예의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여러 번 선을 넘는 일이 있었음에도 모임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모른 척 넘어갔기 때문일까? 모르겠다. 살다 보면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들도 있으니까. 대신에 난 그저 '상황이 그러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라도 말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매번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갔다. 그럴 수도 있지. 너무 미안하면 말도 안 나오는 걸 나도 알고 있으니까. 불편했지만 그런 걸로 관계에 금이 가게 하고 싶진 않아 그냥 넘어가곤 했다.
그런 내가 문제였을까? S는 점점 선을 넘는 일들에 무감해졌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 그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날이었다. S의 일이 끝나길 기다리다가 약속했던 장소에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S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나의 전화에 잠깐 당황하던 S는 나와의 약속을 깜박했다며 오고 싶으면 자신이 친구를 만나고 있는 자리에 와도 된다고 '큭큭큭' 웃었다. 그날 나는 S의 무례함에 큰 충격을 받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오랜 시간 저기 건널목 한가운데에 있는 무언가를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단정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 오해, 실수, 예의를 운운하는 몇 번의 문자가 더 오갔다. 이건 기본에 관한 문제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문득,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문자 보내는 걸 그만두었다. 미안함에 진심을 표했다면 달랐겠지만, 그날 S가 보였던 놀랍도록 가벼운 반응에 나는 그만 의지를 잃었던 것이다. 아니, 내가 노력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거라 생각한 게 맞았다. 정리된 관계는 혼자 상상했던 괴로움보다 한결 수월했다. 다행히도 무거운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고 나는 그렇게 우리의 관계를 더욱 똑바로 직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진 어디까지나 나의 입장일 뿐,
법정스님의 말씀대로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란 서로의 입장이 있는 거니까. 물론 나는 S의 또다른 입장도 존중한다. S가 나를 오해하고 있을까? 아니, 괜찮다. 나도 이미 S를 오해하고 있었으니까. 사실 누군가 나를 오해한들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데 뭐이 그리 대수겠는가. 어차피 우리는 늘 누군가를 오해하고 누군가에게 오해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 동등한 사람으로서, 흔히 말하듯 인간 대 인간으로서 열린 마음으로 덤벼든다. 그래도 늘 상대를 엉뚱하게 오해하고 만다. 우리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전에, 만나기를 고대하는 동안 오해를 해버린다. 함께 있는 동안에도 오해를 한다. 그러고 나서 집에 가 다른 누군가에게 그 만남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서 또 완전히 오해를 해버린다. 일반적으로 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에, 모든 것이 사실은 이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어지러운 착각일 뿐이며, 오해가 빚어낸 놀라운 소극일 뿐이다....
-<미국의 목가> 필립 로스-
나는 눈앞을 가린 손가락 사이의 흐릿한 형체가 전부라고 생각했다. 나와 너무도 잘 맞았던 사람이니까. 나는 S를 백 퍼센트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백퍼 센트라는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왜 그를 그다지도 믿고 싶었던 걸까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마도 나는 나를 믿고 싶었던 것 같다. 그를 친구로 삼았던 나를. 그에게 내 모든 것을 보여줬던 나를. 그가 평생 함께 보자고 말하던 순간의 벅찬 감정의 나를. 그와 함께 즐거웠던 모든 순간순간들의 나를 말이다. 그래, 나는 너를 오해했고 너도 나를 오해했다.
S_ 2018년 가을, 시절 인연을 잃다.
몇 년간 함께 모임을 하며 의지했던 S였다.
여러 사람들과 얽힌 관계가 불편해지는 게 걱정됐던 나는 작은 실수와 작은 오해들의 실체를 똑바로 보지 않고 피하길 여려해, 결국 시절 인연을 잃었다.
목록_
01. 프롤로그_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방식
02. 서점_ 주인 모르게 홀로 팔아버린 책들
03. 리본_ 범인을 잡기 위해 놓은 덫에 걸린 나
04. 브래지어_ 입었을까 안 입었을까?
05. 미미_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인가
06. S_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07. M_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어
08. 아빠_ 간신히 되찾았으나 기어코 잃어버렸다.
09. 분노_ 감정의 잔해더미에서 살아남기
10. 개그감_ 나이가 들면 웃을 일도 사라지고
11. 머리숱_ 자연스럽다기엔 좀 억울하다
12. 에필로그_ 잃어버려서 잊어버린 걸까, 잊어버려서 잃어버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