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진미 Sep 19. 2022

M_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어

사라질 수 없는 세계에서 너는 완벽히 사라졌다. 몇 사람만 건너면 전 세계의 누구와도 연락이 닿는 SNS에서도 너는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어디쯤에서 너를 잃어버린 걸까?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있다. 너의 표정. 조금씩 변해가는 너의 지친 표정이 너를 잃기 전의 모든 기억들을 덮어버렸다.

  

나보다 4살이 많았던 너와 20대의 대부분을 함께 했다.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았다. 느리고 순한 너와 달리 나는 성질이 급하고 거칠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너는 내게 맞춰줬고 나는 너를 함부로 대했다. 평생 내 곁에 있을 줄만 알았다. 어느 날 말도 없이 내 곁을 사라지기 전까지. 나는 너를 잃어버렸다.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다. 종로와 인사동, 서울역과 명동 일대를 걷던 날들도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발을 디딜 때마다 여기저기서 삐걱이며 울부짖던 너의 일본식 집. 겨울이면 새빨개진 코를 감싸 쥐며 일본식 집은 너무 춥다고 웃으며 뜨거운 고구마를 먹었지. 남자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검은색 코트를 걸치던 너의 멋진 엄마, 유독 수줍음이 많아 나에게 만나서 성격 좀 바꿔 달라고 부탁했던 너의 오빠,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똘똘한 동생까지. 아직도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너는 내 눈앞에 없다.   

   

나만 알던 내 못난 성격 때문에 너를 잃어버린 것이 분명하다. 참을성 없고, 욱하고, 짜증이 많고 늘 비관적이던 나를 너는 부단히도 안아주었다. 하지만 내 가족은 물론 나 조차도 나를 참지 못할 때가 많은데 너라고 별수 있었을까. 한 가지. 그런 나를 오랫동안 참아줬던 너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한 것이 마음 아프다. 네가 없는 내 인생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 옆에서 짜증 내는 나를 달래주고 욱하던 내 손을 잡아주던 너. 죽을 때까지 너는 가시 돋친 내 등을  쓸어내려줄 거라 생각했다. 네가 남자였다면 청혼했을 거라 말한 건 내 진심이었다.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우리가 함께 늙는 걸 상상해 보곤 했다.     


어디 갔냐고 소리쳤다. 왜 나를 달래주지 않냐고, 도대체 왜 연락이 안 되는지 이해되지 않아 자꾸만 화가 났다. 화가 나서 연락을 받지 않았다. 나의 분노는 점점 커져갔다. 어느 날 너는 사라졌고 나는 당황했다. 증오에 찬 나는 네 번호를 지웠다. 허무하게 너를 잃었다. 시간이 지나 내가 작정하고 너를 찾아 나섰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비명소리로 우리를 웃기던 일본식 집도 다 허물어져 어디로 이사를 간 건지 알 수 없었다. 연락을 기다렸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다. 나는 너를 잃어버렸고 너는 내 손을 놓아버렸다는 걸 한참 뒤에 알았다.     

 

서울역이 내려다 보이던 2층 카페. 추운 겨울이면 나란히 앉아, 하얀 눈이 열차와 철로를 뒤덮는 풍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소복이 쌓이는 눈. 새하얗게 변해가는 고요한 철로들을 내려다보는 것이 좋았다. 따뜻한 차와, 뜨거운 커피가 모두 식을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찾아간 그 카페에도 너는 없었다. 너의 집을 가기 위해 오르던 언덕 위의 건물들도 모두 헐리고, 언덕은 낮은 대지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너를 찾으러 갈 곳조차 없었다.


 때문에 나는 변했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있는 사람이 됐다. 불평도 하지 않고 욱하는 성질도 조금쯤 고쳤다. 늘 비관적이던 내 머릿속에 작은 날개 하나를 달아주었다. 너에게 보여주고 싶지만 너를 찾을  없다. 새로운 인연을 만날 때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너를 잃었는지를 되새기며 조심스레 인연을 만난다. 느긋하게 다가가고 잠시 멈춰 상대방을 살핀다. 멈출 때마다 아득해지며 네가 떠오른다. 네가 내게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지만 타인은 우리를 해칠 수도 있다.

관계는 끊임없는 궤도수정을 요하며, 매우 노련한 조종사조차 가끔씩 가시에 찔린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에릭 와이너는 ‘고슴도치의 딜레마’로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맞다. 나는 M을 너무 힘껏 끌어안고자 했다. 생각해보면 통증에 무감각한 나와는 달리 M은 힘겨워했던 듯하다. 겨우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은 순간에도 나는 또다시 M에게 바짝 다가가 상처 주기를 반복했다. 견디다 못한 M은 조용히 내 곁을 떠났다.


나는 M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내 흉측한 상처들을 볼 수 있었다. 상처 내야만 안도하는 가학적인 습관에 중독되었던 것 같다. 자신의 통증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내가 타인의 상처를 어찌 이해할 수 있었을까. 나는 M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내 상처와, 흉한 딱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딱지가 모두 떨어지고 분홍빛의 새살이 올라오는 것을 보며 M과의 관계들을 되새겼다. 그리고 M의 상처와 통증들, 새살이 돋기도 전에 또다시 돌진했던 나의 뾰족한 가시들에 대해 생각했다.


시몬 베유는 ‘15분간의 순수한 관심이 8시간 동안의 게으르고 성긴 관심보다 낫다’고 말한다. ‘관심은 질보다 양을 파악하기가 더 쉽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 가장 쉬운 것을 평가한다.’고 한, 에릭 와이너의 글을 읽고 나니 나는 중요한 것이 아닌 쉬운 것에 집착했다는 것을 알겠다. M은 더 순수한 관심을 원했을지 모른다. 나의 무차별적이고 이기적일 정도록 몰아붙이는 관심의 양이 아니라. 하지만 나는 몰랐다. 순수한 관심은 어쩐지 지루하고 어렵다. 대신 나는 더 가볍고 많이, 쉽게 다가가길 원했고 그것이 우리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리라 생각했었다.


시간이 오래 흘렀고 어쩌면 나는 M을 정말 영원히 잃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다.


M_ 2011년 연락 두절.

M을 첫 회사에서 만났다. 처음부터 동료가 아닌 유년 시절을 함께 한 듯 마음이 맞았다. 
오랜 시간 서로를 의지했지만 언젠가부터 연락이 뜸하다가 2011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찾아가 본 M의 동네에는 거대한 건물들이 들어섰고 어디에서도 M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목록_     

01. 프롤로그_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방식

02. 서점_ 주인 모르게 홀로 팔아버린 책들

03. 리본_ 범인을 잡기 위해 놓은 덫에 걸린 나

04. 브래지어_ 입었을까 안 입었을까?

05. 미미_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인가

06. S_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07. M_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어

08. 아빠_ 간신히 되찾았으나 기어코 잃어버렸다.

09. 분노_ 감정의 잔해더미에서 살아남기

10. 개그감_ 나이가 들면 웃을 일도 사라지고

11. 머리숱_ 자연스럽다기엔 좀 억울하다

12. 에필로그_ 잃어버려서 잊어버린 걸까, 잊어버려서 잃어버린 걸까?

이전 07화 아빠_ 간신히 되찾았으나 기어코 잃어버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